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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 양태론 시비의 실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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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 양태론 시비의 실상(2)

 

 

지방교회 측이 양태론을 믿는다고 비판한 사람들 중에 최삼경 목사, 이인규 권사, 김홍기 목사가 있습니다. 지방교회 측은 그동안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론은 성경적이며, 오히려 비판자들의 삼위일체관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여러 차례의 토론을 통해 한국교계 앞에 폭로해 왔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직간접적인 결과로, 최삼경 목사는 한기총과 본인이 소속된 장로교 통합교단에 의해, 이인규 권사는 장로교 합동 교단에 의해 각각 삼위일체론에서의 이단으로 공식 규정되었습니다(그런데도 문제가 많은 이 분들의 주장 내용은 문서 혹은 유튜브 형태로 지금도 인터넷 상에서 확산되고 있음).

 

최삼경 목사 이단 규정 기사: https://www.localchurch.kr/defense/29851

이인규 권사 이단 규정 기사: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43974

김홍기 목사 삼신론 이단 사상: https://www.youtube.com/watch?v=AVC34QhFLyY

 

과거에 스스로 한국 교계를 대변한다며 여러 단체와 개인에게 이단 시비를 걸어 이단으로 정죄되게 한 것에 비춰볼 때, 오히려 그러한 장본인들이 공교단에 의해 삼위일체론에서의 이단으로 규정된 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비진리를 기준으로 남을 정죄한 것에 대한 사필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계는 주로 이들의 주장을 근거로 억울하게 양태론자로 정죄된 선의의 피해자들(지방교회 측 포함)에 대해 조만간 어떤 형태로든지 재평가 작업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론에 관해 위 세 사람이 모두 오해했던 진리 항목들에 대해, 김홍기 목사와 토론 내용을 중심으로 그 실상을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할 것입니다.

 

이 글은 그 중 두 번째로서 주로 ‘세 위격 간의 상호내주 개념’(요 14:11)을 오해하여 성경적으로 믿는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 측을 부당하게 ‘일위일체를 믿는 양태론자’로 정죄한 것을 다루고자 합니다.

 

 

2. 김홍기 목사는 ‘세 위격’ 간의 상호 내주(perichorsis)를 ‘동일 본성’ 간의 내주로 착각하여, 위트니스 리를 오해했다.


어거스틴과 달리, 삼위의 셋을 강조하는 신학 구조 위에 삼위일체론을 구축한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성부만 하나님이 아니라 성자와 성령도 참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그렇다면 세 하나님들이 계신다는 말인가?’라는 오해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교부들은 이런 도전에 대해 현재의 김홍기 목사처럼 삼위께서 ‘동일 본질’을 공유하신다는 논리로 대응하지 않고, 아래에서 보듯이 ‘페리코레시스’(상호 내주) 이론으로  후대에 지칭된 논리로 반박했다.


‘co-inherence’ 교리는 삼신론의 발발에 대한 정통신학의 응답이었다. … 이 교리는 사실상 4세기의 신학자들에게로 소급된다. ... Prestige는 또 그것이 원래 기독론적인 용어였는데, 그것을 채택한 다메섹의 요한 때에 삼위일체 분야에로 전이되었다”라고 말한다(김석환, 위의 책, 249쪽).


위 짧은 인용문은 두 가지 사실을 전달한다. 첫째는 캅바도키아 교부들처럼 삼위께서 동일 본성의 공유하심을 믿어도 삼신론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 페리코레시스 이론이 “원래 기독론적인 용어”라는 말은 이것이 원래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라는 각기 다른 두 본성들 간의 ‘상호 내재’를 설명하는 용어라는 말이다. 따라서 이 용어를 삼위일체에도 원용하려면 기독론에서처럼 최소한 둘 이상의 대상이 필요하다. 이렇게 볼 때 김 목사처럼 삼위의 한 동일 본성이 서로 안에 내주한다는 말은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만일 그가 기독론에서처럼 세 위격들 안에도 다른 두 본성이 서로 내주하심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이단교리이다.


이제 이런 기본 배경을 토대로 김 목사의 ‘동일 본성 간의 상호 내주’ 주장이 왜 억지에 불과하며 잘못된 것인지를 네 가지 방면에서 살펴보갰다.


1) 성경은 성부와 성자라는 ‘위격’ 간의 상호 내주를 말하고, ‘본성’의 상호 내주를 말하지 않는다.


소위 ‘페리코레시스’ 즉 상호 내주 이론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그대는 믿지 않습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분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라는 요한복음 14장 10절 등을 근거로 한다. 그런데 여기서 서로 안에 내주하시는 ‘주체’가 김 목사의 억지 주장처럼 동일 본성(nature)이 아니라 ‘내가’ 혹은 ‘아버지’와 같은 위격들(Persons)이시라는 점은 더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자명하다. 위 문맥에서도 성자가 말씀하심은 어떤 모호한 ‘본성’이 아닌 ‘성부’라는 분명한 ‘위격’이 성자 안에 내주하시면서 일하신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상호 내주’는 ‘동일 본성의 내주’라는 김홍기 목사의 주장은 설 땅이 없게 된다.


2) 본성의 내주를 말하려면 기독론에서처럼 두 본성이 전제된 내주이어야 한다.


‘제임스 우맥’(James Womack)은 ‘제임스 기포드’(James D. Giffoed)의 페리코레시스를 주제로 쓴 박사학위 논문에 소개된 내용에서, “그레고리의 때부터 다마스커스의 요한 때까지 ‘페리코레시스’에 대한 신학적인 용법은 그리스도의 두 본성들에 관한 것이었다”라고 했다(From the time of Gregory until John [of Damascus] each theological use of perichorsis was in reference to the two natures of Christ)(Womack, “comparison”, 37). 그러나 ‘유사본성’조차 허용되지 않는 삼위일체론을 논하면서, ‘위격들’이 아니라 ‘동일 본성’이 ‘서로’(mutual) 안에 내주하신다는 김홍기 목사의 주장은 삼위 안에 기독론에서처럼 ‘복수의 본성’이 존재한다는 주장처럼 들린다. 이것은 심각한 이단 사상인데 아마도 김 목사는 자신이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것은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구심이 든다.


3) 정통 신학자들이 말한 ‘페리코레시스’는 ‘본성의 상호 내주’가 아니라 ‘위격 간의 상호 내주’였다.


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김석환 박사는 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2001년)에서 교부들의 ‘상호 내주’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첫째, 캅바도키아 교부들의 상호 내주 개념: 독자들은 아래 내용이 각 위격 상호 간과 위격과 실체간의 공동 내재성을 모두 말하고 있는 점을 유의해서 보기 바란다.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후대에 '페리코레시스'라는 이름으로 설명된 이론을 체계화했다. 즉 각 위격 간에 한 동일 실체가 전부 다 들어 있다. 각 위격 상호간에, 또 위격과 실체간에 공동내재성(immanence) 또는 상호 상통성이 있다. 두 위격이나 세 위격을 합하더라도 다른 한 위격보다 결코 더 크지 않다. ...그 성경적인 근거는 요한복음 14:10이다(29쪽).


둘째, 아타나시우스의 상호 내주 개념: 김 박사는 “아타나시우스가 요한복음 14:10의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 하느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는 말씀에 대하여 일곱 번 이상이나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라고 했다(위의 책 113쪽). 아래에서 언급된 ‘하나’ 혹은 ‘다른 것’이 동일 본성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점은 명백하다.


어떻게 하나가 다른 것 안에 포함될 수 있으며, 또 그 다른 것이 그 하나 안에 포함될 수 있는가? 또는 도대체 어떻게 더 크신 아버지가 더 작으신 아들 안에 포함될 수 있으신가? 또는 우리에 관하여 기록된바, '우리가 그 안에서 살며 기동하며 또 우리의 존재를 갖느니라(행17:28)는 말씀을 생각할 때, 만일 아들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다면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112-113쪽). … '성 삼위일체의 제 2격은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적인 하나님(Whole or entire God)이시다'(114쪽) … 성자의 존재가 성부에게서 오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부 안에 계심을 안다'(115쪽).


셋째, 불(Bull) 주교의 상호 내주 개념: 김 박사는 불 주교의 상호 내주 개념을 '삼신론을 비롯한 이단들의 교리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정리된 이론체계’로 설명하는 연장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래에서 볼 수 있는 ‘셋’ 혹은 ‘서로 안에’라는 표현을 김 목사처럼 ‘동일 본성’을 가리킨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셋이 서로가 서로 안에 거하시고,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에게 흘러 들어가시며 서로를 관통하신다'(Defensio Fidei Nicaenae II, 9. 23)(세 위격의 이러한 불가분리의 행위에 대해서 훗날 신학자들이 ‘페리코레시스’라는 전문용어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영어로 ‘co-inherence에 해당된다.)(250쪽).


넷째, 아우구스티누스의 상호 내주 개념: 김 박사는 위 책 299쪽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단일성과 삼위성을 논하면서 위격들의 ‘상호 내주’의 관점에서의 삼위일체성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역시 ‘위격들’의 상호 내주이지 동일 본성 간의 상호 내주가 아니다. 본성을 가리켜 ‘그들’이라거나 ‘하나’ 혹은 ‘다른 하나’라는 말을 쓸 수 없다는 것은 더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최고의 삼위일체의 경우에는 하나가 셋을 합한 것만 하며, 둘을 합해도 하나보다 더하지 않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자체가 무한하시다. 그래서 하나 하나가 다른 하나 하나 안에 계시며, 모든 이 안에 계시다. 또 모든 이가 모든 이 안에 계시며,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시다'(299쪽).


다섯째, 다메섹 요한의 상호 내주 개념'...각 위격은 다른 위격 안에서...존재를 가지신다'(위의 책, 300쪽).


위에서 본 것처럼 캅바도키아 교부들, 아타나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다메섹 요한 등 정통교회 삼위일체 수립에 공헌한 정통 교부들의 상호 내재 개념은 한결같이 ‘위격들 간의 상호 내주’이지 ‘동일 본성 간의 상호 내주’가 아니었다. 동일 본성은 ‘공유’하는 것이지 결코 ‘상호’ ‘내주’하는 것이 될 수 없다.


4) 김명용 박사의 상호 내재 개념: 장신대 총장을 역임한 김명용 박사도 아래와 같이 세 위격이 동일한 하나의 본질(우시아)을 공유함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추가하여 ‘페리코레시스’(상호침투)를 “세 하나님이 하나 되심”의 안전 장치로 소개하고 있다. 김홍기 목사는 삼위의 동일 본질을 믿는 정통 신학자들 사이에서 왜 이처럼 추가적으로 ‘페리코레시스’ 이론이 진지하게 논의되어 왔는지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규정하는 정통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데 이 세 하나님은 같은 하나의 본질(우시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 그러면 이 세 하나님의 하나되심은 어떻게 되는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에 대해 결정적인 표현을 한 고대 교회의 삼위일체론의 교부는 다메섹의 요한이었다. 요한은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고, 이 세 하나님은 본질이 같으신 하나님이신데, 이 세 하나님은 상호침투(페리코레시스)와 함께 하심으로 하나됨을 유지하고 계신다고 가르쳤다. … 이 상호침투(페리코레시스)와 함께 하심의 의미는 예수께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요14:7-11 참고)라는 말씀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요한에 의하면 성부는 성자와 함께 계시고 성자 안에 계신다. 이런 까닭에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고 아들이 행하시는 일은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일과 동일하다(김명용, 교회와 신앙, 2001년 10월호).


우리는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논의되어 온 ‘페리코레시스’(상호 내주)는 동일 본성의 상호 내주라는 김홍기 목사의 주장과 달리, 세 위격들 상호 간의 상호 내주 혹은 상호 관통임을 보아 왔다. 이러한 상호 내주는 위 김명용 박사의 언급처럼 1) 성자와 성부의 동일시, 2) 성자와 성부의 경륜적인 사역의 동일시의 근거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효과는 3) ‘페리코레시스’를 통하여 정통 삼위일체의 중요한 명제 중 하나인 ‘세 위격들은 구별은 되나 ‘분리’되지 않음으로 하나의 신격(one God)을 가지실 수 있다는 것이다. 4) 또한 ‘상호 내주’하시는 특성으로 인해 세 위격은 결코 분리될 수 없으심으로, 성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다른 두 위격도 성자 안에서 함께 오심으로 성자는 ‘삼위 전체’이시기도 하다. 이 점은 다음에서 다룰 ‘본질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와도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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