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 변증자료를 나누기 위한 게시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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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입장 비판에 대한 지방교회 측의 반론(2)

첨부 1

 

“지방 입장론(한 도시-한 교회)의 오류


교회가 우주적으로 하나이다.라고 말하는데 있어서는 누구라도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하나의 교회를 나타내고 표현하고 증거하는 교회들을 말함에 있어서 서로 다른 많은 입장들이 있다. 그 서로 다른 많은 입장들이 곧 서로 다른 견해인 각각의 교리들이다. 성경을 따르는 정상적인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교회의 입장은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라는 분명한 사상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 안으로 믿어들어간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교회의 다른 입장들을 배제하고 그리스도 안으로 돌이킬 것이다. 우선 우리는 교회에 관한 정의(定義 definition)를 알아야 한다.”


반론: 1) 글쓴이는 교회의 ‘기초’(foundation)와 교회의 ‘입장’(ground)을 혼동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최고의 건축자로서 기초를 놓았는데 이 기초는 그리스도시라고 했다(고전 3:10-11). 그런데 입장(터)은 이처럼 그리스도를 기초로 가진 ‘하나님의 건축물’(9절)을 어떤 집터 위에 놓을 것인가를 다루는 문제이다. 즉 성전 건축을 ‘바벨론’에 할지 아니면 귀환하여 ‘예루살렘’에 할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글쓴이는 ‘바벨론’이든 ‘예루살렘’이든 상관없고 성전만 제대로 지으면 된다는 식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 참되게 거듭나서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받은 이들로 이뤄진 교파라면(대부분의 교파가 그렇지 않은가?), 그들은 이미 글쓴이가 말하는 “그리스도 안”(in Christ)에 있는 것이다(롬 6:3, 8:1, 고전 1:30, 4:15, 고후 5:17, 갈 3:27). 그들은 단지 나타난 표현 즉 집터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지역교회의 경계’가 더 성경의 원칙에 맞는지를 논증해야 할 상황에서 글쓴이가 뜬금없이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 엉뚱하다.

 


에클레시아(교회)의 정의(定義)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사용한 헬라어 "에클레시아"가 의미하는 바를 바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신약에서 교회라는 말은 헬라어 에클레시아를 번역한 것인데 회중(assembled people), 모임(Asembly), 집회(集會)를 뜻한다.  성도들의 모임(집회, Assembly, gathering, congregation, meeting)을 뜻하는 "에클레시아"를 오늘날 대 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영어 "쳐치(church)"로 매우 친숙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 기원과 성경의 사상이나, 원어적인 의미에서 전혀 합당하지 않은 잘못된 것이다.


"에클레시아(교회)"의 용어에 대한 기원은 구약에서 히브리어 부르다를 의미하는 "카할"에서 유래된 "야훼 카할" 즉 여호와(주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어 부름받아 나온 이스라엘 회중(모임, 총회)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지정된 장소에서 모임, 회집(會集)을 의미하는 "에다"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신약에서 그 용어는 구약의 "카할"을 "에클레시아"로 번역했고, 구약의 "에다"를 "쉬나고게"로 번역했다. 여기의 헬라어 "쉬나고게"는 함께 모으기(gathering together), 소집함, 집합(assembling)의 의미를 가진다.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발단, 근원을 나타내는 기본 전치사 "에크(~으로부터, from out of) 와 "칼레오(부르다)"로부터 유래된 합성어로서 "~으로부터 불러내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에클레시아(교회)"란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부르심 받아 나온(불러내어진)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집회, Assembly, congregation, gathering)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클레시아를 말하는 교회를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심 받아 나온 거룩한 사람들(성도들)의 모임(집회, 회중)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에클레시아(교회)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어두움과 혼란과 사망의 영역으로부터 나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택하신 곳인 빛과 의와 생명의 영역인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져 부르심을 입은 거룩하게 된 자들(성도들)의 모임을 말한다.”


반론: 교회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인 것은 맞다. 그러나 교회는 이 외에도 그리스도의 몸(엡 1:23)이고, 한 새 사람(2:15)이며, 하나님의 왕국 시민이자 가족이고(2:19), 하나님의 거처인 성전(2:21-22)이고, 그리스도의 신부(5:25-27)이며, 하나님의 전투원(6:11)이다. 따라서 한 몸 혹은 한 새 사람인 교회의 방면과 비교할 때 글쓴이가 말한 에클레시아로서의 교회는 가장 초보적인 교회 정의일 뿐이다. ’한 몸’ 혹은 ‘한 새 사람’은 하나의 유기체로서 결코 분리될 수 없으나 에클레시아 개념은 그 안에서 얼마든지 흩어지거나 또 다른 작은 동그라미를 만들 여지가 많다.


“이 땅의 영역인 지리적인 영역이 아닌, 신성하고 거룩한 영역인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 즉 그리스도의 영역 안에 있는 성도들을 단체적인 그리스도인 교회라고 한다. 그러나 이 우주적이고 총체적이고 보편적인 교회는 영적이고 추상적이고 무형적이고 불 가시적이지만, 그 표현을 위하여 증거하는 교회들(에클레시아스, assemblies)은 각 곳(각각 서로 다른 장소 every place, 헬: 토포스 고전1:2)에서 각각의 모임들(assemblies)로 유형적이고 가시적이고 실재로 나타난다. 한 도시에서도 그들의 모임으로, 우리들의 모임으로 각각 서로 다른 다양한 모임들로 한 본질의 하나인 교회를 경륜적으로 다양하게 증거한다. 이것이 증거하는 교회들이며, 그리스도의 충만이다. 이것은 하나인 면에서 "한 영-한 몸"이지만, 그리스도의 몸의 충만으로서 "일곱 영들-일곱 교회들"로 충만케 됨으로 다양하다.


신약 성경에서 114번 등장하는 에클레시아는 항상 사람들의 모임(assembly, gathering, congregation)을 의미하고 있다. 오늘날 에클레시아를 "쳐치(Church)"로 사용하는 모든 교회들은 조직과 제도와 규례와 유전과 특정한 교리들을 가지고 있다.


에클레시아(교회)는 이 세상의 체계에 속하지 않고 부활하셔서 높이 되신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영역에 속한 하늘에 속한 실체이다(엡1:20-23, 2:6, 히2:12, 12:22-23,빌3:20,엡2:19).”


반론: 1) 엄밀히 말해 교회의 실재는 ‘우리의 영과 연합되신 그 영’이시다(고전 6:17). 이러한 교회의 실재(한 인격)가 각지에 출현한 것이 지역 교회들이다. 그러므로 머리되신 주님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성도들을 박해했던 사울에게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말씀하셨다(행 9:4-5).


2) 요한계시록은 ‘일곱 교회’를 <일곱 금등잔대>라고 말한다(계 1:11, 20). 그런데 이들은 터인 지방(city) 그리고 소극적인 면에서만 다르고, 교회의 본질(금, 등잔대, 빛남)에서는 정확히 같다. 즉 이 일곱 금등잔대를 뒤섞어 놓으면 어떤 것이 어떤 지방에 있는 교회에 해당하는지 구별할 수 없다. 원래 성경적인 지역 교회라면 이러해야 정상이다. 주님은 바로 이런 목표에 도달하게 하시려고 어느 한 교회만 아니라 일곱 교회를 하나로 묶어 “귀가 있는 사람은 그 영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고 거듭 말씀하셨다(계 2:7, 11, 17, 29, 3:6, 13, 22). 사도 바울도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에게 같은 취지의 실행을 가르치고 권했다(골 4:16).


3) 각각 독립된 교회들인데 왜 그랬을까? 모든 지역 교회들은 다 유일한 인격이신 주 예수님만을 표현하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글쓴이는 “하나인 교회를 경륜적으로 다양하게 증거한다.”면서 교회 간의 차이점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것은 한 새 사람인 교회의 간증을 약화시킬 수 있고, 신약 ‘사도들의 가르침’(행 2:42)과 역행하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4) 또한 글쓴이는 <그리스도의 충만> 개념도 오해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에서 영적으로 장성한 성도들 안에서 그리스도가 충만히 표현되는 것을 말하지(엡 1:23, 4:13), 글쓴이의 주장처럼 “다양한 모임들”이 “다양한 표현”을 갖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일곱 금등잔대는 그리스도의 충만에 대한 좋은 그림이다. 그들은 일곱 개이지만.외양은 모두 정확히 같다(계 1:12, 20).


“에클레시아(교회)는 창세 전에 택하신 자 그리스도 안에 있었고(사42:1, 눅23:35, 마12:18), 창세 후에도 시간 안에서 과거에도 그리스도 안에 있었고, 현재에도 그리스도 안에 있고, 앞으로도 그리스도 안에 있을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하늘에 속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시(city of living God)이며(히12:22), 하늘의 국적을 가진 천국 시민으로서(빌3:20) 천국의 도시(city of Heaven)이기도 하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왕국이지만, 본성적으로 하늘에 속한 천국이다. 이제 그 하나님의 나라(왕국)요, 하늘나라(천국)인 교회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풍성을 충만하고(fullness), 다양하게(diversities) 표현되고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왕국의 도시들"로, 하늘에 속한 나라인 "천국의 도시들"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을 증거하는 교회들이라고 한다.”


반론(또는 평가): 글쓴이처럼 교회의 하늘에 속한 방면만을 너무 강조하면 교회의 실행성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T. 오스틴 스팍스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가르친 점에서는 교회사에 크게 기여했으나, 아쉽게도 그는 윗글처럼 이 땅에 출현한 교회 방면을 소홀히 하는 같은 오류를 범했다(글쓴이는 아마도 그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참고로 워치만 니는 이런 시각에 대해 <의자에 대해서 많이 말하나 정작 의자는 보이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교회는 총체적으로는 천국(kingdom of Heaven)이지만, 불가시적인 이 천국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것은 각각의 증거하는 모임들(assemblies)이다. 증거하는 교회들(모임들)은 어디서나 두루 두루 어느 곳에서나(every where, 헬:판타쿠 고전4:17), 그리고 모든 곳에서, 각 가정 집에서, 산에서나 들에서나 모든 장소(every place, 헬;토포스 고전1:2)에 있는 모임들은 천국의 도시(city of kingdom of Heaven)들로 불가시적(不可視的)인 천국을 나타내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천국의 도시들인 증거하는 교회들을 이 세상 나라인 사탄의 왕국인 세상의 체계(cosmos)인 지리적 행정 구역으로 경계(境界)를 하고 분계(分界)를 한다면, 그것은 세상의 행정 구역을 교회의 행정 구역으로 일원화 시킨다는 것으로 로마 카톨릭의 사상과 다를바가 없는 것이다.”


반론: <한 지방–한 교회>의 원칙은 “행정은 (지방적으로) 독립, 교통은 (우주적으로) 하나”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워치만 니는 ‘각 지방 교회가 대법원’이라고도 했다. 이러한 소위 지방 입장의 특징을 극도로 무시한 것이 가톨릭 실행이다. 또한 위 글쓴이의 논리대로라면 “세금 내고” 교통경찰에게 복종하는 것도 “사탄의 왕국인 세상의 체계”에 속한 일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롬 13:1-7). 한마디로 논리의 비약이 심한 비판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에 관한 성경의 사상을 알려면, 우리는 창세기 49장 10절에서 계시한 "실로(Shiloh)"의 예표적인 예언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의 모임을 인격의 실로(sjiloh)를 말씀하신 것인데(창49:10), 그분의 백성들은 지리적인 실로에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다. 실로(shiloh)라는 말의 의미는 안식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샬라"에서 유래된 말이며, 실로(shiloh)는 화해시키는 사람, 안식과 평화를 가져다 주는 사람을 뜻한다. 우리에게 안식과 화평을 가져 오실 분은 오직 한 분이신데 그분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골1:20, 엡2:14,15), 그분은 화평의 왕이시며(사9:60, 안식일의 주(主)이시다(막2:28). 평화의 왕은 살렘 왕이요(히7:2)이요, 유다 지파에게서 나신 영원한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창14;18, 히7:14-17). 여기서 우리는 "실로"와 "살렘"이 동의어(同意語)임을 보게된다. 또한 살렘(salem)은 예루살렘(Jerusalem)의 줄인 이름이며(시76:2), 그 문자의 뜻은 평화와 구원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인격의 실로를 지리적인 실로(삿2:19, 삼상1:3,24)로  경배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들은 실로에서 악을 행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경배의 중심지를 실로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 버리셨다(대하6:6, 7:12-16). 그래도 그들은 실로와 예루살렘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몰랐다. 다만 그들은 지리적인 입장만을 고집했다.”


반론: 실로의 의미가 어찌하든,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경배하라고 거듭 명령하신 것은 성경에 있는 사실이다(신 12:5, 8, 11, 14, 21). 또한 이처럼 구약에서 특정 경배처로 가서 경배하라고 명령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여로보암은 이러한 명령을 어기고 또 다른 경배처를 세움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범했다(왕상 12:30, 13:34, 15:26, 30, 34, 16:19, 26). 여로보암의 사례에서 보듯이 자기만을 관심하거나 야심이 있는 사람일수록 독립을 좋아하고 간섭받기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요한복음 4장에서도 주님은 경배지가 지리적인 입장인 그리심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참된 입장 안에서 경배해야 함을 가르쳐 주셨다(요4:20-24).”


반론: 신구약에서 경배장소 개념이 바뀐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역교회 행정의 경계 문제와는 별개이다. 이 문제는 이미 위에서 ‘기초’와 ‘터’의 비교를 통해 충분히 다뤘다고 본다.


“이러한 성경의 신성한 사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종교 안의 모든 교파들은 물질적이고 지리적인 입장을 교회 입장으로 삼아 분파적인 교회들을 세웠다. 특히 지방교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리적인 입장 위에 교회를 세웠다.


대부분의 많은 성경 교사들이 성경을 문자적인 면만을 취하여 그의 사견(私見)으로 해석한다. 우리는 성경의 문자를 삭제하거나 더하여 변개하는 것도 안 될 일이지만, 성경의 본질을 무시하고 외적인 문자의 면만을 취하여 마치 수학 공식 푸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도 안 된다.


지방 입장론(one city-one church)은 성경의 외적 문자의 면만을 가지고 성경적 근거로 내 세운 것이다. 그러한 잘못된 교리 위에 지방 교회라는 또 하나의 분파적인 교파를 세웠다.”


반론: 1) 글쓴이가 여러 말로 부인하려고 해도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순복음, 가정교회 등 보다는 ‘거듭난 모든 믿는 이들을 차별 없이 다 포함하는’ 지방 교회 개념이 모든 분파를 아우르고 성경적인 장로제도를 갖는 가장 성경적인 지역 교회 원칙임을 본인의 양심이 증거할 것으로 본다(실제로 글쓴이는 뒤에서는 이 원칙이 그 당시에는 성경적이었다고 인정했다).


2) 거듭 밝히지만, 글쓴이는 “불가시적 교회론”에 치우쳐 있고 ‘교회의 실행성’에 대한 성경 기록들은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그 결과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이런 글들은 ‘성직자 평신도 제도’, ‘교파 간의 분열’, ‘대립과 경쟁 구도’(특히 선교지에서) ‘치리의 원칙(마 18:17)의 약화’ 등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우리가 성경의 원칙을 알아도 성경대로 살기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현실을 합리화하려고 성경의 원칙을 허무는 것은 바른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지방 입장론의 성경적 근거들의 오류(誤謬)


“지방 교회가 주장하는 교회의 표현은 한 도시에서 하나의 표현으로 실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표현하고 나타내는 교회는 서로 다른 도시들에서 지방적으로 세워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최초의 지방 교회는 사도행전 8장 1절에서 말하는 "예루살렘"교회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이지, 예루살렘 교회가 아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 있는 미국 대사관은 미국에 속한 것이지 한국에 속한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이 예루살렘에 있지만, 예루살렘에 있는 하늘에 속한 교회,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반론: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행 8:1) 혹은 편의상 줄여서 부르는 ‘예루살렘 교회’는 거듭 말하지만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거듭난 믿는 이들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둘은 같은 말이다. 이것을 글쓴이처럼 우주적인 한 몸이 예루살렘 지역에 대사관을 설치한 것과 같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쉬운 말을 이처럼 복잡하게 꼬아서 말할 이유가 무엇인가? 어차피 교회는 부활체이고 하늘에 속한 유기체라는 것은 더 말이 필요 없는 교회의 고유 속성이 아니던가? 지금은 과연 그러한 대사관이 한 도시에 몇 개가 있어야 하는가를 따지고 있는 것이다.


“또 그들이 말하는 성경의 근거로 마태복음 18장 17절에서 말하는 교회를 그들은 지방 교회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견해일 뿐이다. 우리는 성경을 자신의 견해로 그 해석을 정해 놓고 그 해석에 맞게 성경 구절들을 꿰메는 식의 교리를 만들어서는 안된다.”


반론: 마태복음 18장 17절이 말하는 그 교회가 지방적인 교회가 아니라면 어떤 교회인가? 기존의 교파적 실행으로는 이 본문이 말하는 치리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여러 방면에서 관찰되고 있다.


“또 그들이 말하는 성경적 근거는 사도행전 13장 1절에서 말하는 안디옥 교회이다. 안디옥에 교회의 또 하나의 표현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두 지방 교회(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를 근거로 사도행전 14장 21절과, 23절을 모든 지방 교회들이라고 말하면서 모든 지방 교회들은 하나의 우주적인 교회의 지방적 표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원문)을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이며, 안디옥에 있는 교회이지 그것은 그 도시 이름을 붙인 교회가 아니다. 사도행전 14장 21절과 23절에서도 바울과 그 일행은 루스트라와 이코니움과 안디옥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심지어 이코니움에서는 그들이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도 말씀을 전했다.


교회의 초기에 복음 전도를 위해서 어떤 도시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주님을 영접하고 교회로 모인 자들을 지방 입장론 자들이 주장하는 그러한 교리적인 지방교회라고 할 수는 없다.”


반론: 1) 지방 교회측이 펴낸 신약 성경 회복역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행 8:1), “안디옥에 있는 교회”(행 13:1)라고 바르게 번역했다. 영어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무슨 문제가 있는가?


2) 또한 바울 일행이 여기저기 다니며 복음을 전한 것을 누가 부정한 적이 있는가? 그러나 사도행전은 “루스드라이고니온안디옥으로 되돌아가서 제자들의 혼을 견고하게 하고 … 그들은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선택하여 세우고…그들이 믿은 주님께 장로들을 맡겼다”(행 14:21-23)고 말한다. 또한 바울은 디도에게 “각 도시에 장로들을 세우라”(appoint. elders in every city)고 명령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분명한 성경 기록을 무시하고 자기 소견대로 교회도 세우고 장로도 임명하는 것은 성경 신자가 할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에 복음 전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주께로 돌아 옴으로 그들은 모두 날마다 교회에 가입되었다.(행2:47). 그러나 교회에 가입된 그 수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한 장소에서 서로 교통하며, 떡을 떼지는 못했다. 그들은 날마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모임을 갖고 사도들이 가르친 교리의 교통을 하며 떡을 떼며 그리스도와 교회를 증거하였다(행2:42, 46).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위에(근거) 침례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음으로(행2:38)  본질적으로 교회가 된자들의 총체이다. 그러나 이 하나의 교회는 다양하게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각 가정집에서 모임들(에클레시아스)로 그리스도와 교회를 증거하였다.


지방 입장론의 주장처럼 예루살렘 교회가 도시 전체로 단일하게 한 장소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교통하며 한 모임으로 집회를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 도시에서 한 교회로 표현하고 나타내야 한다는 지방 입장론(한 도시- 한 교회)을 주장한다.”


반론: 이 역시 심각한 사실 왜곡이다.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 혹은 그 누구도 “도시 전체가 단일한 장소에서 모여야 지방 교회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하나의 지역 교회라는 말은 교회 행정이 하나라는 뜻이지,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여러 가정에서 모였지만, 신약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통(행 2:42)을 실행했고 단일한 장로 그룹의 행정 아래 있었다(행 11:30, 14:23, 딛 1:5).


“예루살렘 도시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분명히 하나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시적이고  본질적인 면이다. 그 하나를 나타내고 표현하고 증거하는 것은 가시적으로 실재하는 교회를 말한다. 그 하나를 증거하는 교회들은 그 도시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증가로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증거되어야 한다. 그 다양하게 표현되고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충만을 억제하고 통제하고 제한하는 것은 범죄이다. 실제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여러 가정집들에서 많은 집회(모임)들로 에루살렘에 있는 하나의 교회를 나타내고 증거하였다(행2:42).”


반론: 이 역시 자기 생각일 뿐이고 성경의 기록을 무시하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 안에서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를 따르는 이들을 향해 “모두가 같은 것을 말하고” “분열이 없게 하여” “같은 생각과 같은 의견으로 조율되라”고 간청했다(고전 1:10).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도 비록 여러 가정에서 모였지만 모두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통 안에 꾸준히 머물며, 떡을 떼는 것과 기도하는 것을 꾸준히 계속하였다”(행 2:42). 만일 글쓴이의 주장처럼 교회가 다양하게 표현되어야 하고 제한하는 것이 범죄라면, ‘모두가 같은 것을 말하라’ ’같은 생각’으로 조율되라고 제한했던 사도 바울은 범죄자인가? 글쓴이는 지금 몸의 하나를 지키라는 성경의 권면은 범죄 취급하고 분열의 뒷문은 열어 놓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처럼 보인다. 과연 이런 행동이 누구를 이롭게 할 것인지 좀 더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보기 바란다.


지방 입장론은 서신서들에서 최초의 지방교회로 언급한 곳을 로마서 16장 1절을 근거로 내세운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겐그레아 교회"는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나, 안디옥에 있는 교회와 마찬가지로 겐그레아에 있는 교회(in Cenchrea)이다.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갈 것은 겐그레아에 있는 교회를 서신서들에서 최초로 언급된 지방 교회라고 했지만, 그것은 잘못 안 것이다. 겐그레아라는 도시는 없다. 그것은 고린도시에 있는 한 지역이다. 겐그레아는 고린도 동쪽 10 킬로 거리, 살로니카 만에 위치한 고린도시의 남쪽 항구였다.그것은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고린도시에 속했으니까 오히려 고린도 교회라고 했어야 했다.”


반론: 겐그리아라는 도시가 없고 글쓴이 주장처럼 그곳이 고린도라면 왜 사람들이 그곳을 고린도라고 안 부르고 겐그리아라는 별도의 지명으로 부르겠는가? 그 당시의 행정구역 경계가 어떻게 구분되었는지는 좀 더 살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여기서 고린도전서 1장 2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절은 먼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말하고, 다음에는 그 교회를 설명하는데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들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함으로써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의 하나인 면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그 하나된 성도들인 하나님의 교회가 각각의 모임들을 가짐으로 교회를 표현하고 증거하는 각각의 모임들임을 밝혀준다. 그것이 바로 한 주님이신 우리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인 각 처(every place 각 장소)에 있는 그들의 모임과 우리의 모임으로 구분됨을 알 수 있다. 앞에서 말한 겐그레아 교회도 이러한 각 처에 있는 모임일 것이다.”


반론: 1) 위 고린도전서 1장 2절은 주의를 기울여 읽어야 할 본문이다. 글쓴이의 주장처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여진 부름받은 성도들>은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 2) 그러나 ‘with’로 시작하는 “또 각처에서…” 부분(앞의 직접 수신인은 ‘to’로 시작함)은 고린도 이외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하나님의 교회의 다른 구성원들’을 지칭한 것이다. 즉 고린도전서는 각처에서 합당하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지체들을 포함한 몸 전체에게 보내졌다고 보아야 한다(고전 12:27). 참고로 초기 교회 때 믿는 이들이라는 표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행 9:14, 21).


“지방 입장론은 나타내고 표현하고 증거하는 교회들(모임들)을 성경의 문자적인 조합으로, 도시 단위로 규정해 버렸다. 불가시적인 하나의 교회를 볼 수 있게 나타내고 체험하고 누릴 수 있는 것은 모임(집회)으로 실재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단순한 진리를 왜곡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새 사람이다. 교회는 단체적인 그리스도로써 교회는 그리스도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과 요소(생명과 본성)는 그리스도이며, 교회의 위치(position)와 영역(territory)과 범위(sphere)와 입장(ground)은 그리스도이다.”


반론: 위에서도 지적했지만 위 주장은 교회의 ‘기초’(foundation)와 교회의 ‘입장’(ground)을 혼동한 말이다. 글쓴이 말대로 “입장(ground)은 그리스도”라면, 마태복음 18장 17절이 말하는 ‘치리’를 할 (지역)교회가 모호해진다. 그래서 뜬구름 잡는 교회론이다. 멀리 하늘에 떠 있는 연은 실이 손에 쥐어져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가 아닌 것은 그 무엇으로도 그리스도의 입장을 대치할 수는 없다. 그것이 어떤 세상의 방식이거나, 종교적 유전이거나 조직이거나 제도이거나 규례이거나 특정한 교리이거나 세상의 체계를 따른 어떤 것일지라도 성경을 빙자해서 개인적인 사견으로 교회의 다른 입장을 세울 수는 없다. 로마 카톨릭은 그들의 입장을 세우기 위해서 성경을 왜곡했고, 국립 교회들은 그들의 입장을 세우기 위해서 성경을 왜곡했으며, 도시교회(지방교회)는 그들의 입장을 세우기 위해서 성경을 왜곡했다. 성경을 왜곡하는 자들은 심지어 여호와의 증인들도 그들의 견해로 그들의 교리적인 입장으로 성경을 변개하고 왜곡한다. 오늘날 안식교도들이나, 신율법주의 자들도 그들의 견해로 성경을 보고 그들의 교리를 세운다. 우리는 성경을 혼자 보고 혼자 해석함으로 오류에 빠지는 위험에 처할수 있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하고,  원문 성경과 다른 번역본들을 참고해야 하지만, 또 다른 교사들의 견해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예를들어 교회의 두 방면중 하나인 "나타내고 표현하고 증거하는 방면"에 관해서는 앞서서 많이 수고하신 형제들의 글들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증거하는 교회들에 관해서 추구한 형제들은 "프랭크 바이올라", "진 에드워드", "J.R 리틀 프라우드", "롤란드 알렌", "하워드 스나이더", "T .오스틴 스팍스"형제 등등이 있다. 그러한 형제들은 그 누구하나 지방 입장론을 말하지 않았다.”


예를들어 우리가 다비만을 추구하면, 다비의 제자가 되고 다비만을 증거하는 자가 된다. 우리가 어떤 특정인 만을 추구하고 그 사람의 사상만을 갖게 된다면, 겉은 예수 사상을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 속은 우리가 추구하고 지지하는 그 사람의 사상으로 물들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본인은 몰라도 다른 사람은 그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을 버리지 않는 한 당신은 그 특정한 사람에게 속한 자이기 때문에  단단한 의의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는 어린 아기이고 육신적인 사람인 것이다(고전3:1-4 참조). 그들은 그들을 포로로 사로잡은 그 특정한 교리의 지킴이들일 것이고(계2;15),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를 나누는 교파이다.


반론: 1) 글쓴이 주장처럼 교회의 두 방면을 말한다면 당연히 천상 교회만 아니라 지상 교회의 성경적인 범위도 말해야 옳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된 사람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인 T 어스틴 스팍스 같은 경우 하늘에 속한 교회만을 너무 강조하고 지상 교회와 그 성경적인 범위를 무시하다 보니 그가 말한 ‘하늘에 속한 교회’의 실체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 점은 글쓴이가 주도한 모임에도 적용된다. 2) 이들과 달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워진 사도 바울은 교회의 하늘에 속한 방면(에베소서)과 함께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에서 지상 교회의 행정과 질서를 위해 장로들(감독들)과 집사를 세우는 원칙 등을 자세히 적고 있다. 이 둘을 비교해 볼 때 사도 바울은 균형 잡혀 있고 하늘에 속한 교회 부분만을 강조한 이들은 치우쳤다.


“지방 입장론의 견해에 따르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교회들을 지방교회들이라고 한다. 어떤 도시에 있는 교회는 지방 입장론이 주장하는 교회가 된다.


지방 압장론은 성경은 결코 한 도시 안의 교회들이라고 말한 적이 없으며, 항상 어떤 특정한 장소에 있는 교회라고 말한다고 했다. 예를들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안디옥에 있는교회. 겐그레아에 있는 교회, 고린도에 있는 교회가 지방교회이며, 모든 지방교회마다 하나의 교회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성경은 한 도시 안의 교회들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했지만, 원문을 직역하면, 예루살렘 안에 있는 교회(헬:εν), 안디옥 안에 있는 교회, 고린도 안에 있는 교회, 겐그레아 안에 있는 교회라고 표기했다. 모두가 어떤 도시앞에 안에(in)라는 헬라어 전치사 "엔(εν)이 분명하게 표기 되어 있다. 여하튼 고린도 안에 있는 교회이건, 고린도에 있는 교회이건, 도시 입장에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어떤 도시 안으로 진격한 천국의 도시인 하나님의 교회이다. 앞에서 예를 든 것처럼 한국에 있는 미국 대사관과 같은 개념이다. 분명히 한국에 있는 미국 대사관이지만, 그 소유와 소속은 미국이다. 지방 입장론자들은 교회의 많은 표현들을 나열하면서 그것은 모두 지방 교회들로서 우주적인 한 교회의 많은 지방적인 표현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실제적으로 한 도시 안에 있는 많은 성도들이 지방 입장론적 교회로 표현되지도 않고, 지방 교회가 그 도시의 많은 성도들로 충만하게 표현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하지도 못한다. 그것은 오직 지방 입장론으로 세운 지방 교회 사람들로만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한 도시 안에 지방 교인들만이 한 장소에서 다 함께 모여서 집회할 수 있을 때만이 기능하다. 만일 서울 같은 대 도시 안에 지방 교인이 그 수가 많아서 함께 모여서 한 집회를 할 수 없을 때는 이상한 궤변을 한다. 서울은 행정구역상 지방의 도(道) 보다 큼으로 한 도(道)에 여러곳의 교회들이 있는 것처럼 서울에도 여러 교회들을 인정해야 할 것이지만, 그들의 고집스런 한 도시에는 한 교회라는 억측스런 교리를 지키기 위하여 그 넓은 지역의 각각의 모임들을 각 교회들로 인정하지 않고 서울교회 제 1집회, 제 2집회......제 7집회라는 이상한 교리적 실행을 한다. 그것은 교회의 하나인 면을 확실하게 인정하는 것도 아니고, 또 교회의 표현적인 면을 확실하게 인정하는 것도 아닌 짬뽕 교리이다. 그들은 그들이 세운 "한 도시- 한 교회"라는 지방 입장론에 스스로 묶여 버린 것이다. 그들은 사실 지방 교리의 카톨릭 교회이다. 내가 여기서 지방교회의 교리의 카톨릭이라고 말함은 지방 교회는 오직 한 사람의 교리를 전 세계적으로 일원화 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그들의 하나는 그 특정한 교리의 하나이다. 그들은 교회는 하나이지만, 불가시적이고 본질적인 그 하나를 나타내고 표현하고 증거하는 교회들의 다양함과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인정하지 않고,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충만을 한 도시라는 지방 입장으로 막아버리고 제한해 버렸다. 지방 입장론은 교회와 교회의 경계는 도시와 도시의 경계선으로 해야 하며, 교회는 한 도시보다 작아서도 안되고 한 도시보다 커서도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도시와 교회를 일원화시키는 교회 입장론의 성경 근거중 하나로 사도행전 14장 23절에서 말하는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세우고"라는 말과 디도서 1장 5절에서 말하는 "각 성읍(every city)에서 장로들을 세우게하려함이니"라는 말을 조합하여 각 도시가 각 교회들이 세워지는 입장이라는 문자적이고 철학적인 견해를 채택한 것이다.”


반론: 같은 오류의 되풀이일 뿐이다. 1) ‘한 도시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이 그 지방의 교회를 이룬다는 말이나 위 글쓴이의 주장이나 무엇이 다른가? 2) 과거에 복음의 처녀지였던 중국 대륙에 여러 교단 배경을 가진 각 선교단체들이 “어떤 도시들 안으로 진격”했는데 과연 “천국의 도시인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졌는가? 사실은 정반대였다. 선교사들이 한 도시 안에 다른 교단 배경을 가진 여러 교파들을 세움으로 선교사들끼리 서로 경쟁하고 반목하는 구도가 형성되고 그 결과 하나의 간증은 커녕 분열과 혼잡만 가중시켰다. 이것은 중국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등 다른 지역에서도 관찰되는공통된 현상이다. 몸의 하나와 합당한 지역교회의 원칙에 대한 인식은 없이 ‘진격’만 한다고 천상의 교회가 지상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3) 또한 서울시가 도(道)보다 크니까 서울에는 여러 교회들이 있어야 한다는 말도 ‘행정의 독립’을 근간으로 하는 지방교회의 본질에 무지하거나 (글쓴이가 이것을 모르지 않을 것임으로) 억지 주장일 뿐이다.


“그들은 또 "갈라디아의 교회들(갈1:2)"에 대해서 갈라디아는 고대 로마제국의 한 도(道)였다고 말함으로써 철저한 행정 구역을 교회와 연계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갈라디아의 여러 지역에 천국이 천국의 도시들로 진격한 것임을 보지 못하고 다만 문자적으로 행정 구역상 도(道)는 여러개의 시(city)가 있음으로 도시와 교회가 표현상 하나이기 때문에 교회도 여러 교회들이 있다고 문자적인 견해를 갖는다. 그러나 바울의 복음 전파의 사역을 안다면, 그러한 어리석은 교회 입장론을 세우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인구가 많은 큰 도시에서 작은 도시로 복음을 전파하게 되면, 더 작은 지역으로까지 확산될 것이란 확신으로 그러한 복음 사역의 전술가였다. 그것을 마치 한 도시 한 교회라는 지방 입장론을 세웠다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울 당시 한 도(道)에 불과 몇 안되는 교회들이 세워진 것을 그리스도의 충만, 교회의 확산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교회의 초기에 이 도시 저 도시에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가 세워졌을 때, 그 것은 교회 확산의 종료가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 시작은 한 도시 중심으로 시작되어 그 도시 안의 여러 지역은 물론 그 인근 작은 도시로까지 천국의 확산을 가져옴으로써 그리스도의 충만이 되는 것이다. 초기에 한 도시에 몇 안되는 성도들이 가진 모임은 그 도시 전체로 확산 되지는 안했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들어왔을 때, 한 도시에 처음에는 몇 안되는 성도를 얻었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증거하는 교회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과 함께 교회는 전 도시로 확산 되었고, 모임들도 그 도시 여러 곳들에서 교회를 다양하게 표현하고 증거하게 되었다. 절대로 한 도시에서 하나의 모임(집회)으로는 도시 전체 안에 있는 교회의 하나됨을 표현하고 증거할 수 없다.


우리는 한 본질인 한 영-한 몸과 단체적인 그리스도를 곳곳에서 다양하게 표현하고 증거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만일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나의 좁은 견해로 성경의 문자적인 면을 발췌(拔萃)하여 그것들을 조립하여 큰 발견이나 한 것처럼 교회의 입장을 세움으로 그리스도의 입장을 대치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반론: 논점이 없는 주장일 뿐이다. 1) 복음이 어느 한 도시에 전해지면 그곳으로부터 다른 지역으로 자연스럽게 확산되는 것을 누가 부인하는가? 2) 특정 도시 안에 있는 교회를 그곳의 거듭난 모든 이들과 동일시한 지방교회 개념을 글쓴이는 자꾸 특정 모임장소(예배당)에 하나로 모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한 후 그것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허수아비 치기식 비판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단수)는 각 가정에서 모였지만, 한 장로단의 행정 아래 있는 한 교회라는 것이다. 3) 지역 교회의 본질과 표현은 어디서나 같게 나타나야 한다는 점은 요한계시록의 일곱 금등잔대가 정확히 같은 외양을 가진다는 것으로 이미 충분히 설명했다. 다양성은 한 몸 안에 있는 지체들이 가지는 기능의 다양성일 경우에는 바람직하지만(롬 12:6-8, 고전 12:4-11), 글쓴이의 주장처럼 “곳곳에서 다양하게 표현하고 증거하는” 식의 다양성은 분열의 씨앗 혹은 그 열매이다. 같은 금 등잔대들의 모습이 성경이 지향하는 지역교회의 모습이다.


“지방 입장론 자들은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을 근거로 말한 것처럼, 마게도냐의 교회들(고후8:10), 유대의 교회들(갈1;22, 살전2:14), 수리아와 길리기아의 교회들(행15:41), 각처 각 교회(고전4:17), 하나님의 교회들(고전11:16), 이방인의, 모든 교회들(롬 16:4), 그리스도의 교회들(롬16:16), 성도들의 모든 교회들(고전14:33), 모든 교회들(고전7:17).등등 이상과 같이 신약 안에 언급된 모든 교회들은 모두 지방 교회들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땅 위에 있는 우주적인 한 교회의 지방적인 표현들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초기의 교회들로서 한 도시에 나타난 한 우주적인 교회의 지방적 표현은 맞는 말이겠지만, 현대에 복음의 확산으로 많은 성도들이 더해진 전 세계적으로나, 전 국가적으로나, 전 도시적으로 성도들이 서로 볼 수 없는 상황인 우주적인 한 교회의 오직 유일한 하나의 표현을 지방적으로 나타내야 한다는 지방 입장론은 현실적으로나 체험적으로나, 성경적으로나 그것은 전혀 실제적이지 않는 견해이다.


앞에서 나열한 지방 교회들이라는 성경의 근거들은 전혀 맞지 않다. 예를 들면, 롬 16장 4절의 이방인들의 모든 교회들과 16장 16절의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지방교회들이 아니라, 철저한 가정 교회들(가정집 모임들, assemblies)이었다.”


반론: 1)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의 몸이다. 이러한 교회가 시대가 바뀌었다고 다르게 나타나야 한다는 위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인간적인 발상에 불과하다. 그나마 글쓴이가 “그 당시 초기의 교회들로서 한 도시에 나타난 한 우주적인 교회의 지방적 표현은 맞는 말이겠지만“이라고 인정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2) 글쓴이가 암시한 것처럼 이방인의 모든 교회들”(롬 16:4),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들”(롬 16:16)이 가정마다 장로들을 세워 각기 다른 행정을 가졌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비록 여러 가정에서 모였지만 그 도시 단위로 단 하나의 교회였다는 점은 성경에서 분명하다(행 8:1). 그렇다면 분명한 성경적인 실행은 무시하고 분열과 혼잡이 예상되는 가정 단위로 행정을 갖는 지역 교회 실행을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설득력이 없는 주장일 뿐이다.


“지방 입장론은 도시(지방) 이름으로 불리워질 수 없는 교회들까지도 모두 지방교회들이라고 규정해 버린다. 예를 들어 ○○의 집에 있는 교회라든지, 모임(교회)을 말하는 ○○와 함께 있는 성도들이라든지 ○○와 함께 있는 형제들은 모두 증거하는 교회들인데도 지방 입장론이 말하는 지방 교회들 이라고 주장한다. 또 데살로니카 사람들의 교회라든지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라고 지칭하는 교회들도 그들은 다 지방 교회라고 말한다.


지방 입장론은 한 도시를 각 지방 교회의 경계선과 입장으로 삼는다고 주장한다. 그 성경적 근거로 계시록 1장 11절을 제시한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주님은 요한에게 네가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곧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에게 보내라고 하셨다. 이것은 전달자는 요한인데 수신자는 일곱 교회들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는 중국본토나 인도를 포함하는 아시아가 아니라, 소 아시아, 곧 지금의 터키 지역이다. 그 수신자들은 일곱 교회들로서 지난 19세기에 걸쳐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발생한 모든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 일곱 교회들은 다만 지리적인 도시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사를 통한 전 역사에 걸친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그이름으로 상징되고 그 전개 과정을 소개된 순서대로 보여주고 있다.”


반론(평가): 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사도 요한 당시 실존했던 지방 교회들이다. 이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글쓴이의 주장처럼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들 가운데 있는 모든 영적인 상태를 말한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은 둘 다 인정해야 균형 잡힌 교회론이라고 할 수 있다. 워치만 니는 <교회의 정통>(한국복음서원)에서 그런 부분을 자세히 다뤘다.


“에베소는 신부가 남편에게 그러하듯 사랑스런을 표현하고, 서머나는 몰약을 뜻하는데 이것은 교회가 극심한 핍박기간에 겪은 고난과 순교의 죽음과 일치한다. 버가모는 결혼과 견고한 탑을 뜻하는데 세상과 결혼하여 높고 견고한 탑이된 타락한 영적 상태를 말한다. 두아디라는 향기로운 희생제물 또는 끊임 없는희생제물을 의미하는데 변절한 로마천주교를 상징하고 끊임없는 미사로 희생제물로 가득하다. 사데는 남은자, 또는 회복을 의미하는데, 종교개혁은 소수의 믿는 이들들 곧 남은자들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빌라델비아는 형제 사랑의 교회를 상징하고, 라오디게아는 믿는 이들의 의견, 판단을 의미한다. 이것은 회복되었다가 타락한 교회를 상징한다.  요한의 서신은 이러한 일곱가지 영적 상태의 교회들에게 전달된 것이다. 그것은 지방 입장론자들이 주장하는 일곱 도시 교회들을 근거로 내세울 충분한 입장이 못된다.”


반론: 글쓴이는 두 가지 모두가 가능한 내용을 두고 어느 한 가지로 다른 한 가지를 부인하는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즉 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글쓴이가 말한 것처럼 영적 의미를 내포할 수도 있지만, 실존했던 지방교회들이기도 했다. 전자만 강조하고 후자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들을 지방 교회들을 입증하는 지방 입장론의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옹색한 그들의 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유일한 교회를 증거하는 교회들이 그 영적 상태가 나쁜데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표현하는 교회들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보다 성도들이 더 많고 영적 상태도 좋은 곳이 많은데 왜 유독 나쁜 상태의 작은 교회들을 택해서 오늘날의 교회들에게 까지 경고의 말씀으로 전달되게 하셨는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방 교회의 입장론의 근거로는 합당치 않은 성경 구절들이다.


특히나 지방 입장론은 교회들은 한 도시를 각 지방 교회의 경계선과 입장으로 삼음으로써 여러 도시들에 세워진다고 말하면서 계시록의 일곱 교회들을 근거로 내세웠다.”


반론: 영적 상태가 나빠도 교회는 교회이다. 사도 바울은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도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렀고(고전 1:2), 주님도 비록 영적 상태가 나쁜 교회들이 일부 포함되었지만 소아시아의 일곱 도시에 있는 지역 교회들을 일곱 교회라고 말씀하셨다(계 1:11, 20). 글쓴이가 몸이 건강할 때나 아프거나 심지어 죄를 지을 때도 자기 자신이듯이 (지역) 교회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말은 어떤 도시에도 한 교회 이상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다. 어떤 도시 뿐만 아니라 어떤 국가나 전 우주에서도 교회는 유일한 하나이다. 그러나 그 하나인 면을 증거하는 표현은 최소 단위가 된다. 교회의 표현은 모임으로 그 실재를 증거하기 때문이다. 증거하는 교회란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서로의 지체가 되어 서로 섬김으로 서로 주고 받는 열린 교통을 함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단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표현하고 증거하는 모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 모임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한 도시일 지라도 그 도시의 여러 지역, 여러 장소에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다양하게 증거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충만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방 입장론은 교회가 소재한 그 도시보다 크지도 않고 그 도시보다 작지도 않아야 한다는 매우 철학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사탄의 왕국인 지리적 행정 체계인 이 땅의 도시 경계선으로 교회를 한정짓는 매우 고약한 발상이다. 우리는 교회(에클레시아), 곧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님의 교회의 입장은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라는 사상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다른 입장들을 반대하고 배제해야 한다. 그것은 몸을 나누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분열하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교회의 하나를 전세계적인 입장을 주장하고, 국가(국립) 교회는 교회의 하나를 국가 입장으로 주장하고, 지방교회는 교회의 하나를 한 도시 입장으로 주장한다. 이것은 본질적인 면과 총체적인 면에서는 교회가 전 세계적이거나, 전 국가적이거나, 전 도시적이거나 교회는 하나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 하나를 표현하고 증거하는 면에서는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다양하고 충만하게 증거하는 교회(모임)들로 실행하고 표현한다.“


반론: 1) 예전의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처럼 여전히 하나의 도시 안에 하나의 교회라는 행정을 유지하면서, 각 가정에서 혹은 소그룹 구성원들끼리 친밀한 섬김과 교통을 갖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2) 역시 오류의 반복이다. 교회의 기초는 그리스도이지만, 교회의 입장 곧 터(ground)는 지역 교회의 경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글쓴이의 주장처럼 교회의 경계가 ‘그리스도 안에’라면 지방 교회의 행정을 주관하는 장로들은 어떤 기준으로 세울 것인가? 또한 누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없는지를 누가 어떻게 진단할 것인가? 교회의 실행 방면을 무시한 교회론은 그럴듯해 보여도 실체가 없는 교회론일 뿐이다.


“끝으로 각 교파들은 그들의 교리적 입장으로 세우는 교회들을 한 도시에 한 교회를 세워 표현한다. 지방교회 교파도 그들과 같이 한 도시에 하나의 교회를 세운다. 적어도 다른 교단들은 서울 같은 대 도시에서는 한 교회만을 세우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의 교회 입장론이 옳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보다 못한 교회 입장론을 주장하는 지방교회 입장론의 오류를 밝히고자 하는 말이다.”


반론: 위와 같은 말은 한 도시에 하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은 잘못이고, 여러 교단이 난무하여 여러 교회들을 세우는 것이 더 성경적이라는 의도를 함축한 무책임한 주장이다.


“오늘날 진정한 주의 회복이란 이 땅에 그리스도와 교회를  다양하고 충만하게 표현되는 아무 제한 받지 않고 통제 받지 않는 각각의 열린 모임으로 확산 되는 것이다.”


반론: 주의 회복이란 성경에 원래 있던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이다. 성경과 초기 교회는 원칙과 질서를 따라 몸의 하나를 중요시 하며 질서있게 확산되었지, 글쓴이의 주장처럼 아무런 제한과 통제를 받지 않은 채 인수와 모임만 확산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해 세운 지역 교회들은 모두 지방 단위의 교회들이었다(가정모임도 지역 교회의 초기 모습일 뿐 가정마다 별도의 장로들과 별도의 행정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성경에는 오늘날 수도 없이 나뉘어진 교파의 근거를 찾기 어렵다. 워치만 니는 성경적인 교회를 1) 성령의 권위가 역사하고 2) 지방 입장 위에 세워진 교회라고 압축해서 설명한 적이 있다. 만일 이 두 가지가 없는 “각각의 열린 모임”은 시간이 갈수록 이질적이 되거나 분열하여 경쟁 구도에 휘말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나님의 교회를 로마 카톨릭처럼 행정적으로, 제도적으로, 교리적으로, 통제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그 영의 하나됨 만을 힘써 지켜야 한다(엡4:3).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고 몸이되신 교회는 어떤 특정한 행정 구역이나, 제도나 특정한 교리적으로 묶어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그 영 안에서 하나를 지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것을 표현하고 증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은 각처, 각 곳에서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모임들로 그 하나를 증거하고 표현해야 한다. 모임이 있는 곳에 교회가 나타나고 표현되고 증거된다.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모이고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 모임이 곧 실재(實在)의 교회이다. 모임이 있는 곳에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증거하는 교회들이 있다. 아멘.”


반론: 역시 교회의 한 방면만 강조하고 다른 면을 간과한 치우친 주장이다. 글쓴이의 말처럼 “모임이 있는 곳에 교회가 나타나고 표현되고 증거된다.”고 하더라도 그 모습이 여전히 분열적이라면 합당한 교회 간증이 아닌 것이다. 오늘날 약 4만 개의 교파로 나뉘어진 이 모습이 우리가 성경에서 읽은 그 영광스러운 교회 모습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 양심이 증거한다. 여전히 타락한 육체가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지역 교회에는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것처럼 권면과 경계와 심지어 치리의 제한이 따를 때 비로소 질서와 하나의 간증이 유지된다. 물론 이것은 사랑과 영적 생명의 법을 따라 해야 하며 천주교식의 제한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 안에 아무런 제한도 없어야 한다는 위 필자의 주장은 천주교의 인위적인 제한 못지 않은 또 다른 극단이다.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는 주님의 명령과 제한조차도 나무라는 식의 위와 같은 주장은 또 다른 형태의 누룩이 될 수 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부풀림으로 우리 모두는 깨어서 이런 교묘한 다른 가르침을 분별하고 경계해야 마땅하다(딤전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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