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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교회측이 김홍기 목사에게 묻는다 : “세 분리된 위격들”을 믿는 것이 ‘정통 삼위일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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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교회측이 김홍기 목사에게 묻는다 :
“세 분리된 위격들”을 믿는 것이 ‘정통 삼위일체’인가?

 

 

독자들은 왜 갑자기 캐나다에 거주하는 김홍기 목사가 미국에 있는 지방 교회측을 한국에 있는 지면에서 비판하고 있는지 궁금해 할 수 있다. 이 토론은 교회와 신앙 편집자가 밝힌 대로, 쌍방이 미주 크리스찬 투데이에서 가졌던 다섯 차례의 1차 토론[1]의 연장이다. 따라서 지방 교회측의 아래 반론은 1차 토론 내용과 함께 검토되면 좋을 것이다. 지방 교회측은 김 목사가 쓴 첫 글에 대해 1. 배경 설명, 2. 삼위의 ‘상호내재’(페리코레시스) 진리로 크게 둘로 나누어 반론하고자 한다.

 

 

1. 배경 설명


존 앵커버그와 존 웰던은 1999년에 <이단과 신흥종교 백과사전>을 집필하여 ‘하비스트 하우스 출판사’를 통해 출간했다. 저자들은 700쪽이 넘은 방대한 책에 단 1쪽 정도 분량으로 지방교회를 끼워 넣은 후(여호와의 증인은 82쪽), 총론 부분에서 이 책 안에 담긴 이단들은 인신매매, 사람을 제물로 바침 등 윤리적,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있다는 식의 인상을 독자들에게 주려고 했다. 쌍방 간의 오랜 공방 후[2] 저자들과 출판사측은 “지방 교회들은 이 책에 담긴 이단들의 특징과는 무관하다”고 법정 선서 증언에서 밝혔고, 텍사스 법원은 종교 문제를 다루지 않겠다고 해서 법적 절차는 종결되었다.


그러나 그후 위 출판사 및 저자들과 오랫동안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 오던 노먼 가이슬러를 포함한 70여명의 인사들이 위트니스 리의 책들에서 문맥을 무시하고 떼어 낸 "이단처럼 보이거나 언어도단인 것 같은 충격적인 진술들”[3]이 담긴 서류에 서명한, 소위 ‘오픈 레터’라는 것을 지방 교회측에게 보내왔다. 지방 교회측은 그 내용에 대해 2차에 걸쳐 상세히 해명했고[4], 지방 교회측과 오랜 적대 관계에 있었던 CRI측도 6년간의 재평가 후, 지방 교회측 편에 서서 위 ‘오픈 레터’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한 논문을, “우리가 틀렸었다”(We Were Wrong)라는 제목의 특집글로 발표했다.[5] 이에 대해 노먼 가이슬러가 ‘오픈 레터’의 연장에서 다시 반박했고, 이러한 노먼 가이슬러의 반박에 대해 지방 교회측이 <Brothers, Hear Our Defense>(DCP Press, 2011)라는 네 권의 소책자로 재차 반박했다.[6]


김 목사가 이 곳에 쓰는 글은 지난 1차 토론 때와 마찬가지로 큰 틀에서 볼 때 위 노먼 가이슬러의 주장과 같은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본인은 자신의 글이 독창적이라고 주장함). 이점은 실제로 그의 첫 글로도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지방 교회측에서 본다면, 이런 내용들은 이미 김 목사와의 지난 1차 토론까지 합치면 무려 네 차례에 걸쳐 거듭 반박 또는 해명된 것들이다.


김 목사는 첫 글의 서두에서, “지방교회가 한국보다 미국에서 훨씬 더 많이 알려지게” 된 이유로, 소송을 많이 걸고, 위트니스 리의 주요 사역지가 미국이고, 그가 “타고난 논쟁가”이고, ‘잘못된 진리’를 전한 것을 나열했다. 이런 주장은 가이슬러를 포함한 일부가 무지 또는 오해를 토대로 만들어 낸 출처에 근거하나, 실체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부터 과연 무엇이 실체적 진실인지를 간략히 해명해 보고자 한다.


워치만 니의 친밀한 동역자인 위트니스 리는 1962년부터 미국 LA 인근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형제회 경험을 배경으로, 성경의 무오성, 주 예수님의 처녀 탄생, 대속의 죽음, 육체적 부활, 재림 등 소위 ‘근본주의 5대 원칙’을 굳게 믿는다. 아울러 그가 이러한 성경의 핵심 진리를 토대로, 말씀을 기도로 읽기 등 주님을 주관적으로 체험하도록 돕는 실행을 보급하자, 새신자는 물론 활력있는 신앙생활을 갈급해오던 기존 성도들이 지방 교회들과 함께하는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부흥 내지는 ‘성도들의 수평 이동’ 현상은 점차적으로 기득권 세력이던 복음주의와 은사주의 진영의 주목과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그런 토양 속에서 그 당시 유력한 변증가들이었던 AIA의 파산티노 부부와 월터 마틴의 '크리스천 리서치 인스티튜트'(CRI) 직원들이 위트니스 리를 양태론 등으로 비판하는 소책자들과 <신흥 이단들>(The New Cults)이라는 책자를 펴냈다. 그후 이 자료들은 미국에서 이단관련 새 책이 나올 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재인용되고 또 거짓이 더해졌다. 이런 자료들은 지방 교회들의 확산을 싫어하는 사람들에 의해 심지어 TV 광고 등으로 미전역에 확산되었고, 그로 인해 지방 교회측 성도들 중 상당수가 가족(관계단절, 파혼)과 학교(왕따)와 직장(실직) 등 사회생활 전반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소송을 많이 한다', '위트니스 리가 “타고난 논쟁가”이다’라는 김 목사의 주장은 위와같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거짓되고 악의적으로 만들어진 허상일 뿐 결코 실체적 진실이 아니다.


먼저 소송 문제는 김 목사가 인용한 Pement의 거짓 주장과는 달리, 지방 교회측이 소송을 제기한 것은 지난 반 세기 동안 오직 세번 뿐이었다.[7] 그것도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이 거듭 거부되고, 달리 방법이 없을 때 부득이 하게 취해진 조치였다. 결과적으로, 위 세 사례 중 SCP의 <갓멘> 책자의 경우는 심각한 명예훼손으로 확정 판결이 났다. 토마스 넬슨사의 <마인드 벤더즈> 책자는 미국 전역 18개 주류 신문에 공개 사과문을 게재하고, 모든 책을 유통에서 회수하는 조건으로 법정 합의되었다. 현재 본 토론과 연관이 있는 <이단과 신흥종교 백과사전>(하비스트 하우스 출판사)은 위 서두의 설명과 같다. 특히 이들은 먼저 소송을 걸어 왔었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몰몬교와 여호와의 증인들을 들먹이고, 지방 교회측이 ‘소송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심각한 사실 왜곡이다. 김 목사가 참으로 피먼트의 자료를 신뢰한다면, 지방 교회측이 여호와의 증인과 몰몬교보다 더 많은 "소송을 제기했다”[8]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에 대한 입증 책임은 김 목사 본인에게 있다(단지 뜬 소문을 나열할 것이 아니라 소송을 제기했다는 증거를 제시하기 바란다).


또한 “타고난 논쟁가”와 관련하여 소개한 ‘배교’ 문제도 원문에서는 그것이 ‘로마 천주교’를 가리킴에도, 김 목사는 중간에 일곱 줄이나 생략한 후 뒤의 내용을 임의로 끌어다 붙여 조작한 ‘오픈 레터’의 비양심적인 자료를 근거로, 위트니스 리가 ‘개신교’를 배교라고 공격했다며 호전적 논쟁가로 몰아갔다. 또한 김 목사는 “기독교에 관해서 담대히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평화를 가질 수 없다…”라는 위트니스 리 말의 의도를 완전히 왜곡시켰다. 위트니스 리는 이 문맥에서 기독교계 내에서, “목사를 ‘reverend’라고 부르는 것”, “크리스마스 트리와 산타크로스” 실행, “분열” 등이 계시록 17장이 말하는 ‘바벨론 요소들’(계17장)의 일부임을 지적하지 않으면 평강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김 목사는 이것을 “위트니스 리는 자신의 생각을 공격적으로 전하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 논쟁가이다”라는 식으로 비틀어서 소개하고 있다. 정직하지 않은 처사이다.


이처럼 조작된 문맥으로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는 것이 엘리옷 밀러가 말한 “나쁜 이단 사냥”이다. 우리는 김 목사가 왜 이런 의롭지 못한 일에 거듭 연류되려고 하는지 매우 궁금하고 또 안타까울 뿐이다.


1차 토론에서도 밝혔지만[9],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사역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경륜(딤전1:4), 생명이신 그리스도(요11:25), 그리스도의 충만인 그분의 몸(엡1:23), 몸의 최종 완성인 새 예루살렘(계21:2) 등 적극적인 방면에 할애되었다. 김 목사가 지적한 ‘소송’ 혹은 ‘다소 비판인 표현들’은 부당한 명예훼손에 대응하거나 성경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고 선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지극히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김 목사가 주객을 바꾸는 식으로 왜곡시킨 것은 이웃에 대한 거짓 증거에 해당된다(출20:16).


마지막으로 지방 교회측이 양태론 등 ‘비 진리를 가르친다’는 김 목사의 지적 역시 오해 혹은 판단하는 쪽의 기준에 심각한 하자가 있는 상태에서 나온 결론일 뿐이다. 이 점은 별도의 항목으로 다뤄보겠다.

 


2. 상호내재 진리를 오해한 ‘잠재적 세 하나님들 사상’을 비판함


지방 교회측은 이번 삼위일체 토론이 또 하나의 난삽한 교리논쟁이 아니라, 참으로 한국교회들에게 도움이 되는 토론이 되기를 기도한다. 또한 지난 1차 토론 내용이 너무 어려웠다는 일부 독자들의 반응을 감안하여 최대한 쉽게 표현하는 방식으로 토론글을 쓰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먼저 김 목사가 첫글의 끝 부분에서 인용 소개한, “오늘날의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주는 웨인 그루뎀의 경고를 다시 살펴보는 것으로 김 목사의 삼위일체론 주장에 대한 반론을 시작하겠다.


웨인 그루뎀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된 위격을 인정하지만, 분리되지 않는 존재(being)로서의 하나님의 유일성(unity)을 좀처럼 인식하지 않음으로, 어쩌면 오늘날의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무심코 삼위일체에 관한 삼신론적인 견해를 향하여 나가는 경향이 있는지도 모른다.”[10]라고 경고했다.


그렇다면 웨인 그루뎀은 지금 1) 누구에게 2) 왜 이런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인가? 먼저 이 경고의 대상은 노먼 가이슬러와 김홍기 목사를 포함한 “오늘날의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런 경고를 들어야 하는가? 이 역시 인용 본문에서처럼, “그들이 ‘분리되지 않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유일성(unity)을 좀처럼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 목사는 여기서 언급된 “분리되지 않은 존재”(one undivided being)는 곧 ‘분리되지 않은 본성’을 의미한다고 크게 착각한다.


그렇다면 질문해 보자. 김 목사 생각에, “오늘날의 수많은 복음주의자들” 중 누가 위 인용문처럼 ‘분리되지 않은 본성’을 인식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참으로 그런 사람이 있기나 한가? 만일 누구든지 삼위의 본성의 분리를 주장하는 복음주의자가 있다면, 그는 ‘복음주의자’는 커녕 심각한 이단 사상의 소유자일 뿐이다.


우리는 김 목사에게 위 인용문 바로 위 두 단락을 다시 주의하여 읽어볼 것을 권유하겠다. 그렇게 한다면 웨인 그루뎀이 김 목사의 오해처럼 ‘본질의 단일성’ 부정론자들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대신에 웨인 그루뎀은 “분리되지 않는 존재(being)로서의 하나님의 유일성(unity)”을 소홀히 하면서, ‘세 위격들’이심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그 “각 위격이 온전한 하나님”(each person is fully God)이라고 주장하면, 결국 본의 아니게 “세 하나님들”(three Gods)로 빗나갈 가능성을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주장대로라면, 노먼 가이슬러와 김홍기 목사 본인도 이 경고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김 목사의 눈이 열려 이 점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역시 김 목사가 첫 글에서 소개한 스코트 호렐(Scott  Horrell)이 해당 논문[11] 서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서방 신학은 삼위일체를 교리적으로만 취급해 왔고 또 오랫동안 크게 관심을 두지도 않아왔다. 그러나 1990 년대 초반에 판넨베르크의 등장과 함께, “삼위일체는 현재의 신학 토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후 삼위일체론은 최근 들어 칼 라너, 몰트만, 밀리아드 에릭슨, 캐더린 라쿤자 등에 의해 활발히 논의되었다. 그럼에도 일반 성도들은 물론 심지어 신학 전공자들도 삼위일체 진리는 여전히 어려워 한다.


따라서 이런 점을 고려하여, 지방 교회측은 이번 반론글을 삼위일체의 다양한 방면들 중에서 “세 위격들 중에서 누가 사람 안에 내주하시는가?”라는 문제로 압축하여 내용을 구성하려고 한다. 즉 1) 이에 대한 김 목사와 지방 교회측의 주장을 압축하여 소개하고, 2) 김 목사의 관점이 어떤 논리적 구조틀을 가지며, 3) 그런 가르침이 어떤 성경의 핵심진리를 놓치게 하는지를 드러낼 것이다. 4) 아울러 성경과 ‘정통 신학자들’(김 목사의 주장과 달리, 이것은 소위 ‘전통적인 신학자들’과 동의어가 아니다)의 성경적인 상호내재 개념을 소개할 것이다. 5) 그외에 지면이 허락된만큼 김목사가 문제 제기한 몇 가지 항목들을 말미에서 다루겠다.


1) 요약된 양측 주장의 대비


김홍기 목사는 웨인 그루뎀의 말을 빌려, “세 분리된 위격들”(three separate persons)(마3:16-17)을 주장한다. 그 결과, 제 1격과 3격이 배제된 ‘제 2격 아들만’ 성육신하셨고, 역시 제 1격과 2격은 배제된 ‘제 3격 성령만’ 위격적으로 내주하신다고 믿는다.


그러나 지방 교회측은 ‘페리코레시스’(요14:10-11) 원칙에 따라 ‘삼위께서 동일본질을 공유하심’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세 위격 간의 상호내재’하심을 주장한다. 그 결과, 비록 아들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셨지만(갈4:4), 이 분은 '제 2격'이실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나 분리가 안 되시는 성부와 성령께서 포함된 ‘삼위 전체’이시며, 우리 안에도 삼위 전체가 내주하신다 고 믿는다(엡4:6, 골1:27, 요14:17). 즉 “어느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두 위격들의 오심”이다.


위에서 보듯이 양측은 분명히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차이가 나는 근본 이유는 1. 삼위의 ‘구별’과 ‘분리’ 개념, 2. 상호내재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기인한다.[12] 이 점은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2) 김 목사 주장의 논리와 그 모순점


그렇다면 위와 같은 김 목사의 주장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독자들의 이해를 돕도록 편의상 김 목사측 주장 논리와 문제를 제기하는 시각을 함께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구성해 보겠다.


(1) 김 목사는 웨인 그루뎀의 말을 인용하여, 마태복음 3:16-17에 따라 성부(하늘), 성자(물 위), 성령(공중)은 ‘세 분리된 위격들’(three separate persons)이시다 라고 말한다.(그렇다면 이 분들이 어떻게 여전히 한 하나님이실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는)


(2) 세 위격들은 동일본질을 공유하심으로 한 하나님이시다 라고 답변한다.(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처럼 경륜적인 삼위일체를 말하는 본문을 근거로, 사실상 <장소적으로 분리된 세 위격들>을 강조하면, 결국 ‘세 하나님들’(three Gods), 즉 삼신론으로 기울 수 밖에 없다.[13] 웨인 그루뎀은 이런 점을 “오늘날의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경고했다. 웨인 그루뎀은 삼위의 본질을 분리시키는 것을 경고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나오는 반응이 다음 3번이다.)


(3) 세 위격들은 각각 분리되지만, 삼위가 각 위격 안에 ‘편재’ 하심으로 문제가 안 된다.(그러나 이것은 순환논법에 빠진 억지이다. 그렇다면, 어디든지 편재하시는데 성령이 비둘기 같이 성자에게로 ‘내려오실’ 필요가 무엇인가? 또한 성령은 또다른 보혜사로서 하늘에서 땅으로 보냄을 받으셔야 하는데, 위에서 내려 오셨던 성령은 언제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는가’? 성경에 주 예수님의 승천은 있어도 ‘성령의 승천’을 기록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더구나 ‘세 분리된 위격들’ 사상은, 성육신 하신 아들께서 여전히 ‘아버지 품 속에 계신다’(동사시재가 현재임)(요1:18),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하늘에 있는 인자”(요3:13) 같은 성경 본문을 소화할 수 없다. 여기서 ‘하늘에 있는 인자’는 ‘위격’을 가리킴으로 ‘본질상의 상호내재’ 혹은 ‘편재’ 와는 무관하다.)


이처럼 김 목사의 ‘세 분리된 위격들’의 하나님 주장은 적지 않은 모순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와 논리적인 모순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이런 주장이 신약경륜을 이루는데 핵심이 되는 아래와 같은 본문들에 대한 체험으로부터 믿는 이들을 ‘구조적’으로 격리시킨다는 점이다.


3) 김 목사 주장은 다음과 같은 핵심 성경본문들을 놓치게 만든다.


우선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김 목사가 존 맥아더의 말을 빌려 설명한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의 내주” 즉 ‘그리스도의 위격은 내주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다[14]는 것이다.


또한 이처럼 그리스도의 위격적 내주하심을 부인하면, 다음과 같은 말씀들은 단지 공허한 지식일 뿐이다. 즉 이들에겐 ‘과거’의 그리스도(사복음서)와 ‘미래’의 그리스도(장차 만나게 될)만 있고, ‘현재’의 그리스도(신약 서신서가 생생하게 전하는)가 그들의 삶의 현장 속에는 없게 된다. 바로 이 점이 김홍기 목사가 주장하는 ‘성령만의 내주 사상’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이다.


(1) “‘하나님의 아들’(2격)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요일5:12)라는 말씀에 따라 그들에게는 성령만 계시고 정작 하나님의 아들 자신은 없으니 ‘생명 없는 자’가 되고 만다. 그들은 또한,


(2)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1:21)라고 고백할 수 없다.


(3)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얻고”(빌3:8)라고 고백할 수 없다.


(4)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됨이라”(빌3:9)라고 말할 수 없다.


(5) “그리스도의 충만인 몸”(엡1:23)에 대해서는 지식과 교리 뿐이게 된다.


거듭 강조하건대, 성경 어디도 성령에 의해 ‘대리된’ 그리스도의 내주를 지원하지 않는다. 도리어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스스로 알지 못하면 버리운 자라고 말씀한다(고후13:5). 바울은 만대로부터 감취었던 비밀이 곧 “너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Christ in you) (골1:27) 라고 말했다. ‘세 분리된 위격들’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말씀들을 읽을 때, 자기 생각 안에서 “성령에 의해 대리된 그리스도”라고 임의로 고쳐서 읽는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빌3:7-9)를 힘쓴 신약의 대표적인 사도인 바울의 가르침과 삶의 간증은 이들에게는 그저 낯설기만 할 뿐이다.


더 나아가 이런 잘못된 가르침은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할 우리의 신앙 생활이 그릇된 성령 운동에 휘둘리도록 생태 환경을 제공한 책임에서도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그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삶”(갈2:20)으로써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에서 하나되고 …그리스도의 충만한 신장의 분량에 이르게(엡4:13) 하시려는 하나님의 일하심에도 역행한다. 이처럼 김 목사가 주장하는 “오직 성령만 내주 하신다”는 비진리가 우리에게 주는 후유증은 생각보다 깊고 넓다.


4) 성경적인 상호내재인 ‘위격 간의 내주’를 말하는 정통 신학자들


상호 내재론(Perichoresis)[15]을 조금만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신학 이론이 요한복음 14장 10-11절의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s in Me)라는 말씀에 주로 근거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성경적인 상호내재는 각 위격이 동일 본질을 공유하심에 더하여 서로가 각기 다른 위격 안에도 내주하심을 의미한다. 김 목사(가이슬러)의 오해처럼 세 분리된 위격들(하늘의 성부, 공중의 성령, 물 위의 성자)이 동일 본질을 공유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호내재 개념에 대한 인식 차이가 쌍방의 의견이 나뉘게 된 핵심 원인이다.


독자들은 아래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의 상호내주 주장 모두는 <위격 상호 간의 내주>(지방 교회측)이고, “동일한 신적 본질 안에서의 상호내재”(Geisier and Rhodes, A Response, p.8)(김홍기 목사)만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을 눈여겨 보기 바란다.


1) 어거스틴:


“그들은 각각 자체가 무한하시다. 그래서 하나 하나가 다른 하나 하나 안에 계시며, 모든 이 안에 계신다. 또 모든 이가 모든 이 안에 계시며,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신다(…So both are in each, and all in each… and all in all』[16](어거스틴, On the Trinity(VI), p.103).


2) George Bull 주교:


“상호내재는 세 위격들의 상호내주를 의미하고, 그들이 하나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가 다른 둘 안에도 변함없이 있는 것이다”(George Bull, Defense of the Nicene Creed, Oxford, 1851). “셋이 서로가 서로 안에 거하시고,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에게 흘러 들어가시며, 서로 관통하신다.”(Defensio Fidei Nicaenae II.9.23).


3) A. H. 스트롱: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각각의 위격에 관해서는 구별되는 존재이시지만, 그 위격 간에는 상호 왕래가 있으며, 한 신성한 위격이 다른 위격 안에 내재하시어 한 위격의 고유한 일이 다른 두 위격 중 하나에 속하게 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또한 한 위격의 나타남이 다른 위격의 나타남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호 왕래에 대한 성경의 묘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구별이 그분들의 분리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상호 왕래는 고린도전서 15장 45절(“마지막 아담은 생명주시는 영이 되었나니”)과 고린도후서 3장 17절(“지금 주는 영이시니”)에서 보듯이 그리스도를 ‘그 영’으로, 그 영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지칭하는 것을 설명해 준다. 거룩한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분리된 개체들이 아니다. 각 위격은 다른 두 위격을 포함하며,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위격들의 오심이다. 그러므로 그 영의 오심은 분명 아들의 오심을 포함했다고 보아야한다.“(A. H. 스트롱, Systematic Theology, p.p.332-333).


4) 존 칼빈:


“성부는 전적으로 성자 안에 있고 성자는 전적으로 성부 안에 있다.”(존 칼빈, 기독교강요, 169쪽, 성문).


5) 스코트 호렐:[17]


“말하자면 하나님의 각 위는 어떤 의미에서, 각자의 충만한 위격을 감소시킴이 없이 상호 내주하신다.


6) 로레인 뵈트너:


“주기도문에서…‘아버지’라는 단어는…배타적으로 첫째 위격만을 가리키지 않고, 한 하나님인 세 위격들을 가리킨다.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다.”(Loraine Boettner, Studies in Theology, p. 107).


7) 터툴리안:


정통 교부 터툴리안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 계시는 곳에, 이 세 위격들의 몸인 교회 역시 있다”(Where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are, there too is the Church which is the body of the Three.)라고 했다.[18]


위에서처럼 위격 간의 상호내재를 통해 삼위의 분리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고 ‘상호’ ‘내재’임으로 삼위의 구별을 여전히 유지하는, 위에서 소개된 어거스틴, 터툴리안, George Bull 주교, A.H. 스트롱, 존 칼빈, 스코트 호렐, 로레인 뵈트너는 다 정통교부요 정통 신학자들이다. 지방 교회측은 “주후 4세기 이후 정통교리로 확정되어 현재까지 천칠백 년 이상 정통교회가 고수해 온” 이러한 ‘정통 삼위일체론’을 적극 지지하고 그들과 함께 서 있다.


이와 달리 노먼 가이슬러와 김홍기 목사는 ‘세 위격들 간의 상호내재’(요14:11)를 “지방 교회의 이단적 상호내재론”으로 애써 폄하하고, ‘세 분리된’ 위격들’ 강조하면서 그 ‘각각’이 ‘완전한 하나님’이시라고 말함으로써 사실상 “세 하나님들”(three God)을 주장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즉 이들은 어거스틴이 고백한 “all in each” 대신,두 위격들이 배제된 “제 3격 성령만”의 내주를 외침으로써 스스로 정통 삼위일체론자인 어거스틴과도 다름을 자백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바로 위트니스 리가 말한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자들” 이자 웨인 그루뎀이 위에서 경고한 “오늘날의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아니겠는가!

 


결론적으로, 위 “정통 신학자들”이 가르친 ‘위격들 간의 상호내재’에 따르면, 비록 성자께서 성육신 하셨지만 그분은 곧 삼위 전체이시기도 하다. 또한 우리 안에는 단지 3격 성령님만이 아니라,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시는 ‘삼위 전체’가 내주하신다. 따라서 이와 다른 ‘상호내재’개념에 기초한 김홍기 목사의 “제 3격 성령만의 내주” 주장은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고 정통 신학자들과도 다른 비진리일 뿐이다.


이제 남은 지면에서 김목사가 첫글에서 언급했으나 위에서 다루지 못한 몇 가지를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1) 위트니스 리가 “한 인격”이라고 한 것을 “일위일체”(양태론)라고 비판한 것에 대하여


바로 이런 점이 문맥을 무시하고 꼬투리를 잡아내어 토론에 활용하는 ‘나쁜 이단 사냥”의 또 다른 예이다. 김목사는 자신의 첫글에서 위트니스 리가 그 셋은 항상 동시 존재하며 상호내재한다. 한 분이 이곳에 있을 때는 셋 모두 이곳에 있다”라고 한 말도 소개했다. 그렇다면 ‘상호내재하시는 셋’을 말하는 사람을 ‘일위 일체’를 말한다고 비판하는 것은 비양심적인 거짓 참소일 뿐이다.


위트니스 리가 말한 ‘한 인격’은 ‘일위일체’와는 전혀 무관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태복음 28장 19절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안으로 침례를 주라”에서 ‘단수의 이름’을 가리킨 말이기 때문이다. 즉 삼위는 ‘한 사물’이 아니라 ‘한 인격’(이름)이시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제 의미는, 웨스트민스터 신조 2장 3절도 말하는 “단일한 신격”(박윤선,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영음사,23쪽), 즉 ‘세 위격들이 내포된’ ‘한 신격’(골2:9, ‘theotees’(2320))을 지칭한 표현이다. 따라서 김 목사는 더 이상 사실을 호도하지 말기 바란다.


2) 지방 교회측 상호내재론이 “삼위의 상호내재를 통한 삼위의 구별이 없어짐을 의미한다”는 비판에 대하여


전혀 사실이 아니다. 지방 교회측은 삼위의 구별을 굳게 믿는다. 예를 들어 예정과 선택은 성부에게, 구속은 성자에게, 인침과 보증은 성령께만 돌려지는 속성이며 이는 결코 뒤섞일 수 없다(엡1장). 이 부분도 추후  필요시 상세하게 반론하겠다.


3) 제 2격만 성육신 했음에도 “하나님 전부, 삼일 하나님이 육체가 되셨다”고 한다는 비판에 대하여


지방 교회측도 제 2격이 성육신의 주체이심을 인정한다(갈4:4). 그러나 그 성자 하나님은 1/3 하나님이 아니라 ‘삼위전체’이시라는 것이다. 이것은 위에서 A. H. 스트롱이 말한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위격들의 오심이다”라는 것과 전적으로 부합된다.


4) “아들은 아버지이시고, 주는 성령이시다"라고 했다는 말에 대하여[19]


위 표현의 전반부는 이사야 9장 6절의 “한 아들은…영존하시는 아버지시라”라는 말씀, 후반부는 고린도 후서 3장 17절의 “이제 주님은 그 영이시니”라는 본문 말씀 그대로이다. 지방 교회측은 성경본문에 대한  해석적 이견들에 대해서는 이미 <Brothers, Hear Our Defense>에서 상세하게 다룬 바 있다. 이 역시 김 목사가 추가 비판시 상세하게 반론하겠다.


5) 이제 1차 반박 글을 전부 마무리하기 전에 오해가 없도록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가이슬러나 김홍기 목사는 성령께서 내주하실 때 “아들 하나님도 본성적으로는 내주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는 어거스틴이나 A.H. 스트롱 등과 달리, 성부와 성자께서 ‘위격적으로도’ 우리 안에 내주하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이들은 매우 애석하게도 “all in each”(어거스틴), “삼일 하나님(Triune God)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다”(로레인 뵈트너) 혹은 “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의 몸이다”(터툴리안) 라고는 결코 고백할 수 없다. 이들은 또한 승천하신 예수께서 다소의 사울을 향해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행9:4)라고 말씀하신 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이 순간도 우리 안에 인격적으로 내주해 계시면서(갈2:20) 그분 자신인 생명을 주시고 더 주심으로써(요11:25,10:10하) 그리스도의 충만인 그분의 몸(엡1:23)을 건축하고 계시는 신약의 중심 계시에는 눈 멀어 있다.


우리는 김홍기 목사가 주님의 긍휼하심과 빛 비추심을 통해 제 3격 성령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도 ‘인격적으로’ 김 목사 자신 안에 또 모든 믿는 이들 안에 내주하심(골1:27)을 볼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지방 교회측 진리변증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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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쌍방의 1차 토론내용:  http://www.christiantoday.us/sub.html?section=sc170


[2] 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libel-litigations/harvest-house-et-al/responses/index.html


[3] “나쁜 이단 사냥”은  엘리옷 밀러가 자신의 논문에서 오픈 레터 서명자들을 겨냥하여 쓴 말이다.


[4] 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open-letter.html (영문, E-Book)


[5] “우리가 틀렸었다” 전문(한글)은 여기를 보라. http://www.equip.org/PDF/KoreanOpt.pdf


[6] 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brothershearourdefense.html 이 네 권의 소책자들은 오픈 레터 서명자들과 미국 내 주요 도서관, 신학교, 교계 리더들에게 무료로 배포된 바 있다.


[7] 세 번의 소송은 여기를 보라. 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libel-litigations/index.html


[8] 예를 들어 소위 피먼트 자료에서 CRI, James Bjornstad and Regal Books, Salem Kirban, Jeram Barrs and InterVarsity Press, Moody Press 등은 소송에 대한 언급조차 없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보라. 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responses/Geisler-Rhodes/false-witness-re-litigiousness.html


[9] 위트니스 리 사역의 특징: http://www.christiantoday.us/sub_read.html?uid=23135&section=sc170&section2=


[10] 웨인 그루뎀, 조직신학, 248쪽 참조(영문)


[11] 논문 전문: https://bible.org/article/self-giving-triune-god-iimago-deii-and-nature-local-church-ontology-mission


[12] 엘리옷 밀러는 자신의 논문에서 이 ‘분리와 구별’, 그리고 ‘상호내재’ 문제를 균형있게 다루고 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여기 19-23쪽을 참조하라. http://www.equip.org/PDF/KoreanOpt.pdf


[13] 김 목사는 비록 위격이 분리되어도 동일 본성을 공유함으로 분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떻게 변명하든 요한복음 14:11이 말하는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라는 위격 간의 상호내재 관념이 없고, 이것을 “지방 교회의 이단적 상호 내재론”이라고 정죄하는 한, 위격 간의 분리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14] 혹자는 요한 일서 3:24를 성령이 성부를 대리하여 내주하시는 근거로 제시하기도 하나, 그런 주장은 헬라어 원문상 ‘성령에 의해서’가 ‘안다’를 수식함에도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를 수식하는 것으로 잘못 오해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https://www.localchurch.kr/2434 를 참조.


[15] 페리코레시스 관련된 자료들은 James D. Gifford JR. 가 쓴 <Perichoretic Salvation> (WIPE&STOCK(Eugene, Oregon), 2011) Bibliography(p.p.193-217)를 참고하라. 저자는 이 책에서 ‘페리코레시스’ 개념을 주 예수님의 두 본성, 하나님과 믿는 이들 간의 연합에도 확대하여 적용한다. 그 외에도 ‘페리코레시스’ 개념은 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기독교 문서선교회,2001) 29-30, 249-252, 299-300, 342-344쪽을 참고하라.


[16] 어거스틴은 이어서, “삼위일체 내의 어느 한 위격도 전체 삼위일체보다 더 작지 않으시다. 삼위일체의 존재양식은 하나님의 실체 자체와 동일하다. 각 위격은 신적 존재 전체와 동일하시고, 또 다른 두 위격을 합한 것이나 세 위격 전체와도 동일하시다. 이 세 위격은 모두 합하여 각자와 동일하시다.”라고 말했다(김석환, 위의 책, 300쪽). 이런 말은 각 위격은 그 고유 위격 자체임과 동시에 삼위전체이시기도 하다 라는 지방 교회측 주장과 부합된다.


[17] 김홍기 목사가 지방 교회측을 비판하려고 인용했던 스코트 호렐의 아래 말은 ‘세 위격들이 서로 안에 거주함으로 신격의 단일성을 보존한다’는 문맥이며, 이것은 오히려 지방 교회측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동일 본질을 공유한다는 말에 ‘상호’(mutual) ‘내주’(indwelling)라는 말을 쓰지는 않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김 목사가 인용했던 부분을 조금 넓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But if one stresses the three divine persons, how then is the unity of the Godhead to be defined? For much of the Eastern Orthodox tradition, as for an increasing number of scholars in the West, the unity of the Trinity is to be found in perichoresis, the inner habitation (or coinherence) of each divine person in the other.11 That is, each member of the Godhead in some sense indwells the other, without diminishing the full personhood of each. The essential unity of the Godhead, then, is found both in their intrinsic equality of divine characteristics and also in the intensely personal unity that comes from mutual indwelling.”


[18] Tertullian De baptismo VI,1; see Boff, Trinity and Society 106. See also Schutte, Im Gesprch mit dem Dreieinen Gott, 361-363, and Thompson, Modern Trinitarian Perspectives, 80, 92. While Luther and Calvin made oblique references to the church and the Trinity, they never drew out the implications.


[19] 지방 교회측이 이사야 9장6절, 고린도 후서3장17 절 성경 본문 해석 과정에서 위와 같이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에서의 위격적인 동일시를 언급했지만, 이것은 삼위의 위격들에 대한 지방 교회측의 유일한 시각은 아니다. 위트니스 리는 다른 곳에서 아래와 같이 위격 간의 구별을 좀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따라서 김홍기 목사가 위 내용만을 절대시하여 위트니스 리가 ‘일위일체’를 주장한다는 식으로 왜곡시키는 것은 부당하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 사이에는 구별은 있으나 분리는 없다. 아버지는 아들과 구별되시고, 아들은 그 영과 구별되시며, 그영은 아들 및 아버지와 구별되신다. 신격의 셋은 상호내재 하심 안에서 동시존재하심으로, 그분들은 구별되시나 분리되지는 않으신다. 삼일 하나님 안에 분리는 없고 오직 구별만 있다. 삼일 하나님은 그분의 상호 내재하심 안에서 존재하신다. 한 면에서 그 셋은 서로 안에 거하고 계시며, 동시에 그분들은 공존하고 계신다. 따라서 그분들은 하나이시다. 그분들은 분리되지 않으신다(위트니스 리,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 1993, 17쪽) (영문판)


전 합동신학대학 대학원 총장 박형용 박사도 '신학지남' 1978년 봄호(3월호, 통권 180권) 28-39쪽에서 고린도 후서 3장 17절 본문을 중심으로 ‘경륜적인 삼위일체론에서의 위격 간의 동일시’를 다룬 바 있다. 이러한 견해는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R.B. Gaffin의 견해이기도 하다. 해당 신학논문 전문은 여기를 보라. https://www.localchurch.kr/23379


지방 교회측의 좀 더 깊이 있는 반론은 여기를 보라.
https://contendingforthefaith.org/ko/%ec%9d%b4%ec%82%ac%ec%95%bc%ec%84%9c-9%ec%9e%a5-6%ec%a0%88%ec%9d%98-%ec%95%84%eb%93%a4%ec%9d%b4-%ec%98%81%ec%a1%b4%ed%95%98%ec%8b%9c%eb%8a%94-%ec%95%84%eb%b2%84%ec%a7%80/ (사9:6)
https://contendingforthefaith.org/ko/%ea%b3%a0%eb%a6%b0%eb%8f%84-%ed%9b%84%ec%84%9c-3%ec%9e%a5-17%ec%a0%88%ec%97%90-%ec%9e%88%eb%8a%94-%ec%a3%bc%eb%8b%98%ec%9d%80-%ea%b7%b8-%ec%98%81%ec%9d%b4%ec%8b%ad%eb%8b%88%eb%8b%a4/ (고후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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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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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5.12.15. 01:02
교회와신앙에 올려져 있는 김홍기 목사님의 글에 대한 반론글로 보입니다. 교회와신앙측이 반론권을 허용하면, 김목사 글이 있는 곳에 이 글도 함께 소개되면 좋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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