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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로교(통합측) 목회자의 삼위일체관

첨부 1

 

아래 삼위일체 관련 글과 질문 응답은 장로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신 이 동근 목사님이 운영하시는 홈페이지인 http://new-jerusalem.org/ 에서 운영자의 허락하에 가져 온 것입니다. 이동근 목사님의 홈페이지 내용 전체에 대해 견해를 같이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래 삼위일체관에 대해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 참고자료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삼위일체의 의미와 신비

 

기독교는 지금까지 삼위일체(Trinity)에 대하여 많은 오해와 편견 속에 있었다.

 

기독교 신앙이 목적하는 바는 육(이성)이 아니라 영이며(롬8:6) 영에 도달시킬 방법은 오직 성령만이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이 없는 육의 사람들은 이성에 의한 논리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성서에 대한 사실을 논증시켜 주어 믿음에 도달시키려는 시도를 계속해 왔다.

 

교리의 발달은 곧 성령 없이도 인간의 이성만으로 구원에 도달해 보겠다는 인간의 꾀에서 나온 인간의 계략이며 철저한 인본주의로 흘렀기에 이는 이미 기독교의 본질에서 상실된 것이다.('기독교 실패의 원인6편' 참조)

 

삼위일체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취급해 왔기에 영이 아닌 이성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가늠하고자 하는 것을 차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철두철미하신 화염검인 것이며 삼위일체의 진정한 의미와 본질은 성령으로 만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신학교 재학 중 대학에서 배우는 신학의 교리 그대로를 생활에 적용시키고자 하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같은 신앙을 고수했었다. 이는 어느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현상 이었겠지만 신학을 하기 위해서는 성경뿐만 아니라 모든 과목을 다 배워야 한다. 결국 신앙과 지식이 일치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다 보니 신앙의 깊이에 들어 갈수록 많은 의문과 함께 점점 더 어렵고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평신도들을 볼 때마다 저들은 삼위일체론과 확실한 구원론, 신학적 지식...등을 제대로 알고 신앙을 하는 것일까? 이것을 모르면서 어떻게 신앙 생활들을 할까? 라는 의구심들을 많이 가졌다. 그러나 나중에야 비로소 그것이 판단, 교만, 정죄이며 오히려 내 신앙이 잘못 되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으나 그때는 이미 내 자신이 교만과 오만의 자리에 앉아서 판단, 정죄가 습관처럼 내 생각을 주장한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렇게 된 동기는 지식으로 인한 교만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전8:1) 또한 신학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내 속에는 사랑이 없으면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행동해야 하는 이중성을 보면서 내 신앙이 결국 많이 오염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도할 때와 대화 중에도 언제나 배운 그대로 삼위일체론에 의거해서 성부 즉 하나님 아버지만을 고집했던 어느날 우연히 들은 평신도들끼리의 대화를 듣고부터 내 신앙을 다시 점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A : 오늘 나 하나님께 응답 받았어.
B : 주님이 뭐라고 그래?
A : 응, 성령께서 나보고 사명이 있으니 신학교에 입학하라고 하셨어.
B : 하나님께 주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으니 좋겠다. 이제부터는 평신도가 아니니까 하나님의 종답게 믿음으로만 살아.

 

평신도들의 이런 일상적으로 하는 대화를 통해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으며 그것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우리는 이런 대화를 교회 주변에서 쉽게 접하고 있으며, 접할 때마다 그들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며 하나님, 주님, 성령등 어느 호칭을 부르던 자연스럽게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삼위일체가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신앙의 일상에서는 삼위일체가 이미 합의가 되어 생활화 되었는데 거꾸로 신학에서는 아직도 이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아 논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신학에 의한 개념성과 실제 생활에서의 현실성 사이에서 어떤 합의점으로 이를 어떻게 돌출해 내야만 삼위일체가 진정한 신앙으로 정착될 수 있을까? 라는 수많은 의문과 반문 속에서부터 내 신앙을 다시 재 점검하여 새롭게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삼위일체론은 내용이 길어 편집상 1,2부로 나누어 언급하고자 한다.)

 

1. 삼위일체의 의미

 

1) 이성의 한계와 삼위일체론의 필요성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도 하나의 완전한 설명을 위하여 상반된 역설을 한 대목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성경 한쪽에서는 '하라'하는 말씀이 있는 반면 또 다른 한쪽에서는 '하지 말라'하는 말씀의 모순을 접할 수 있다. 성경은 그 두 가지를 모두 수용했을 때만이 완전함의 실체에 도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편견을 가지고 삼위일체론(De Trinitate)을 본다면 이러한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어디에도 마찬 가지겠지만 어떠한 학문이나 철학 체계를 만나든지 완벽은 있을 수 없으며, 모순은 모순에 의해 또 다른 모순으로 이어지며 그 모순은 항상 전체를 다 보지 못한 편견에 의해 이루어 진다는 사실이다. 편견은 이성에서 나온 것이며 이성은 순수한 사고 이전에 환경과 감각과 지식의 영향 속에서 자라 나온 것이기 때문에 미완성이며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 증거로써 후회와 뉘우침이 바로 이성의 불완전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은 이런 모순 속에서 서로의 의견이 평형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며 절대로 한가지로 일치할 수 없는 것이다. 단 시대의 조류에 따라 받아 들일 수도, 거부되기도 할 뿐이다. 이와 똑 같은 맥락에서 신학의 교리도 철학과 같이 절대 일치할 수 없으며 이것이 곧 이성의 한계이다.

 

이성(논리...등)은 완벽이 아니다. 그러나 이성은 영과 일치되었을 때만 완벽해 질 수 있으며 이성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영이다. 이와 같이 이성으로의 설명은 끝없는 모순의 연속이지만 영으로는 완전한 설명이 가능하다. 하나님의 논증 곧 심령 속에 믿음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증거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이 오직 확신으로 역사되며 그것은 이성과 같이 모순이나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영의 특성은 통일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성령만이 이성의 다양성을 하나로 통일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예로 교회는 성도들이 성령충만할 때 만이 하나로 일치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성경에서 '사랑을 하라' 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으로 막연히 '성경에서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니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을 향한 배려라고 오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웃에 대한 사랑은 배려의 차원이 아니라 각 개인에게 신앙의 생존이 달려있는 절대적이고 실질적인 문제이다. 왜냐하면 반드시 사랑에 도달해야만 성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며 성령을 받았을때만이 성경에 약속되어 있는 온갖 혜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말씀 안에 내포된 진정한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으며 오직 성령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기에 성경은 무조건적인 믿음을 요구했던 것인데 오히려 성령이 없는 육적 신앙들은 믿음이 아닌 이성에 의한 설득을 요구했던 것이다.

 

결국 그 요구에 대하여 이성으로 대응해서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교리인 것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의 대상은 육적 신앙 곧 이성으로만 신앙을 영위하려는 자들을 위한 것이지 영적 신앙을 대상으로 집필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학들은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2)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의 목적과 결과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의 삼위일체론의 목적은 이성을 오용해서 삼위일체(하나님) 신앙을 공격하는 궤변가들을 반박하려는 것과, 육적이며 감성적인 사람들의 공격에 대하여 방어하기 위해서 집필했다고 했던 것이다.

 

특히 기독교 내에서 이방종교의 특성인 다신 사상과 같은 맥락의 삼신론등을 막고자 했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는 석가모니를 믿지만 석가모니 외의 칠성각, 산신각...등에도 절을 하고 신으로 믿는 것과 같이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될 수 있다' 라는 양태적 삼신론등 다신적(Polytheistic)으로 나갈 수 있는 모든 요인을 차단하고 막아서 유일신 하나님으로의 일신사상으로 정립시키는데 있었다.

 

그 결과 성부만 믿는 교회, 성자만 믿는 교회 또는 성령만 믿는 교회 등의 다신론으로 나뉘어지지 않고 지금과 같이 그리스도로 통일된 교회로 이룰 수 있었던 것이 가장 궁극적인 목적의 효과였다.

 

또한 하나님은 어거스틴을 통하여 인간의 이성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언어의 무한성을 다 사용하게 하고서도 하나님에 대한 설명의 부족함을 느끼게 해서 인간의 이성에 의한 한계성을 느끼며 하나님의 신성을 더욱 비밀스럽게 보존시키고자 하는데 있었다.

 

예를 들어 어거스틴은 동일 본질(Homoousios)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에 상당히 충실했으나 결국 그 이론에 모순이 발견되었다. 그는 그것을 '관계'(Reletio)라는 개념으로 극복했으며 위격을 강화 시켜 대치시켰다.(관계 Reletio 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내적 생명력과 피조 세계와의 관계를 의미한다.)

 

'관계'라는 개념으로 극복은 했으나 문제는 또 다시 성서와 일치가 안 되는 모순이 발견된 것이며 '관계'(Reletio)의 개념에서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하여 위격의 작용 곧 정신 가운데 흔적 속에서 통일성의 모순을 극복하려고 하고 있다. 이것은 곧 인간의 언어로써 영의 것을 설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느끼고 인간정신(기억, 이해, 의지)을 통해서 통일성의 모순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으로 육에서 영적인 시도로 올라갔다는 것이다.(이 내용 이상은 많은 신학의 전문성을 요하며 변론의 소지가 있어 여기서 끝내기로 한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이성으로는 영의 것을 극복하고 규명 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으로 영의 것은 이성의 흑백논리로 규명되어질 것이 아니라 받은 자 외에는 모르는 것이다.

 

즉 이성과 이성의 대립은 항상 혼란과 논쟁만이 연속될 것이며 거기에서 서로의 허구를 발견하여 서로를 주장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이성적 인간의 유한성과 영의 무한성을 규명하시고자 한 것이다. 결국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하나님을 도저히 아무 것도 해명하고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통하여서 깨닫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반면 삼위일체 교리에 의한 부작용으로는 마치 적과 싸우라고 총, 칼등의 무기를 주었더니 오히려 그 무기를 가지고 가정으로 들어와 아내를 죽이고 자식들을 죽이는데 사용하는 것과 같이 잘못된 해석과 몰이해로 말미암아 수많은 이단론을 자체 내에서 스스로 만들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교리에 의한 이단 정죄는 하나님의 무한성과 전지성에 대한 의심과 오해이며 하나님의 무한성과 전지성을 인간의 이성으로 헤아리려는 데서 나온 교만이고 사랑에 도달하지 못한 육적 신앙(율법적 신앙)이 만들어낸 허구와 가상이며 그들만의 원칙일 뿐이다. 이단을 막기 위하여 어거스틴이 쓴 삼위일체론이 오히려 그의 진정한 뜻과는 상관없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자들이 인간의 이성에 의한 편견과 무분별한 해석의 오해로 말미암아 오히려 하나님 앞에 신실한 수 많은 의인들을 이단이 아니면서도 이단을 만들게 한 주된 요인이 된 것이다.

 

그동안 기독교는 삼위일체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이용하여 아전인수 격으로 자기들만의 정통교리를 만들어 내어 조금이라도 그 교리에서 어긋나면 가차없이 교회 내에서 이단으로 매도하며 주인으로 군림해 온 것이다. 이와 같이 주인 잃은 삼위일체론은 그동안 남의 손에 의하여 심하게 훼손당하고 파괴되어 왔던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어디까지나 이성일 뿐이며 영과는 상관 없다. 이성의 결과는 죄와 악에 도달되며 이성으로써는 절대 '선'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의 많은 곳에서 이를 지적하고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롬3:10)

 

2. 삼위일체의 신비

 

1) 신학적 해석

 

삼위일체론(De Trinitate)이란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신성 안에 있는 위격의 상호 관계와 작용을 구별하려는 탐구이다. 삼위일체의 실체는 '하나님'이시다. 곧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것이며 하나님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인간들이 사변적으로 성서에 입각하여 각자의 해석에 의해 하나님을 연구한 연구 논문인 것이다. 하나님의 위격의 상호 구별과 작용을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의 형태(형상)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요약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위일체내의 위격들은 상호 간에 구별이 있다고 주장한다. 삼위일체를 전체적으로 부를 때 부수적인 의미에서 '아버지'라고 부를 수는 있어도 삼위일체를 '아들'이라고는 부를 수 없다. '아들되심'이라는 개념은 삼위일체 외에 다른 위격에는 어느 의미로든지 적용할 수 없다.

 

어거스틴이 여기에서 뜻하는 아버지, 아들, 성령등의 지칭은 어떤 본질적이고 양적이며 질적인 구별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격 개념이 표현하는 것은 영원한 관계이다.

한 분 하나님은 아버지 한 분만이, 아들 한 분만이, 성령 한 분만이 독자적으로는 될 수 없다. 하나님은 항상 삼위적인 한 분 하나님으로 즉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계셨고, 계시며, 계실 것이다 라고 했다.

 

2부에서는 기억, 이해, 사랑 속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흔적(Vestigia Trinitatis)을 설명했다. 기억, 이해, 사랑, 이 셋은 세 삶들이 아니라 한 삶이며 또 세 정신이 아니며, 이 둘은 셋이긴 하지만 상호 포함된 한 정신이다.

 

기억, 이해, 사랑이 인간의 한 부분이듯이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며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이 한 하나님임을 지적하고 있으며 기억, 이해, 사랑이 본래의 삼위일체(하나님의 형상) 이미지를 회복함으로써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이해와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삼위일체론의 마지막을 사랑으로 그리스도인의 경건의 삶을 살 것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이 제시하는 바와 목적지는 사랑을 통하여 경건된 신앙을 목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위일체를 함축해서 삼위의 위격과 통일성으로 나누어 삼위일체론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삼위의 위격과 일체

 

삼위의 위격(Three Persons)에 대하여 물을 비유로 설명한다면 물은(H2O) 즉 수소(H2)와 산소(O)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때 물을 성부, 산소는 성자, 수소를 성령이라는 형식으로 설명해 보자면 산소와 수소가 일정한 비율에 의해 결합되어 물이 되기 이전의 각각의 개체인 산소 하나만을 가지고 물이라 할 수 없으며, 또 수소 하나만을 가지고 물이라 할 수 없다.

 

또한 산소를 수소라고 할 수 없으며, 수소를 산소라고 할 수도 없다는 것으로 삼위의 위격들을 설명할 수 있다. 곧 물은 물이며, 산소는 산소이고, 수소는 수소인 각각의 개체인 것이다. 이러한 각 개체의 본질은 물이다.(물이란 뜻은 삼위의 일체에서 성자도 성부요, 성령도 성부라는 내용을 설명하기 위한 형식을 취한 것임.) 또 산소, 수소가 함께 있을 때 물이라 한다. 또한 물 안에 산소, 수소는 동등하며 수소와 산소도 물 안에서는 동등하다. 산소, 수소는 완전하며 수소, 산소도 완전하다. 이제 산소, 수소, 물은 분리할 수 없는 일체로써 물이라 한다.

 

이와같이 '산소는 산소이면서 본질은 물이며 수소는 수소이면서 본질은 물이다' 라는 등식을 갖게 되는 것이며 이는 곧 위격으로만 본다면 성부는 성부, 성자는 성자, 성령은 성령으로써의 삼위는 각각의 고유한 위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서로 동등하며 완전하며 분리할 수 없는 항상 영원히 함께 계시며 한 분으로만 작용하신다.

 

동일본질의 통일성에 입각한 삼위일체의 해석

 

통일성이란 이미 다른 개체와 개체가 모여 한 개로의 완전한 집합을 뜻하며, 이러한 개체의 집합은 동일한 가운데 통일성을 이루고 이때 각각의 개체는 없어 지고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예를 들면 결혼한 한 여자는 하나이면서 위치와 처지에 따라서 각각의 명칭을 부여 받는다. 가정에서는 자녀들의 어머니로, 친정에서는 이모로 또는 고모로 각 호칭은 달리 하지만 한 여자이다. 여기에 어머니, 이모, 고모의 통일성은 그 여자의 이름인 윤순희라는 이름만이 통일성에 도달한다. 윤순희라는 이름 안에는 어머니, 이모, 고모가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부, 성자, 성령의 각 위격들은 단지 명칭만 바뀌었지 하나님(성부)이라는 통일성(본질, 일체) 속에 이미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주장은 고모, 이모, 어머니(위격)는 있되 윤순희(성부)라는 이름만 불러 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것은 윤순희라는 이름 안에 이모, 고모, 어머니의 뜻이 포함되어 있듯이 이미 하나님 성부 안에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고 함축된 의미이기 때문이다.

 

2) 해석의 과정과 단계들

 

삼위일체론은 여러 단계로 나뉘어 구분할 수 있겠다.

 

첫번째 단계인 학술적으로만 해석하고 바라보면 어거스틴의 고집스러운 하나의 일관된 통일성의 주장만 만나게 되지만, 두번째 단계에서 보면 상호 모순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이 단계에서 이성의 한계와 이성의 모순을 찾을 수 있다.

 

세번째 단계에서는 진술에 대한 허술함을 만나 실망하게 된다. '이것 때문에 1,600여년 가까이 교계에 이런 논쟁들이 일어났나' 하는 허탈감과 '이렇게 허술한 것을 믿어야 하나' 라는 실망감을 느낄 것이며, 네번째 단계에 와서야 진정한 삼위일체의 의미를 바라볼 수 있으며 참 삼위일체 사상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2부인 제9권째에서 '사랑'이 개입되면서부터 지금까지의 모순과 싸움이 새로운 각도로 보여 지는 것이다. 즉 자연적 이성으로는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어렵다 라는 것과 또한 인간의 말이나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지식에는 미치지도 못한다는 것을 제 15권에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삼위일체를 완전히 보는 것은 우리에게 약속된 축복이지만 현재로는 거울 속을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볼 것을 교훈하고 있으며, 이 마음은 영혼에서도 가장 우수한 부분이며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능력을 받았으며, 이 마음은 내면적인 것을 주관하듯이 하나님 이외에는 마음보다 높거나 지배하는 것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말을 많이 했으나 최고 삼위일체의 형언할 수 없으심에 합당한 말은 전혀 없었다는 것을 공헌하며 그분에 대한 기이한 지식은 너무도 위대해서 나는 능히 미치지 못한다"

 

이 고백 속에서 어거스틴은 삼위 일체론을 학술적으로만 보지말고 몇 가지의 요소를 가입시켜 보아 달라는 것인데 그것은 대 우주적이며 근원적인 실재자(성령, 사랑)을 가입시켜서 볼 때만이 그 실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론을 12권까지 집필하고 일단 중단했다. 그후 누가 이 완성되지 않은 책을 출판함으로써 어거스틴은 당황한 것이다. 그 이유는 자기가 생각하는 삼위일체론과는 다르게 오해될까 하는 염려에서였다. 그래서 나머지 부분을 3권을 추가하여 15권으로 된 삼위일체론을 최종적으로 출판했다. 지금도 주장되어지고 있는 기존 신학의 삼위일체는 7권까지만 가지고도 신학적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하는데는 조금도 부족이 없다. 그런데 12권까지의 집필에도 불구하고 당황해서 나머지 3권을 추가해서 출판한 것은 '사랑'(성령)이 빠졌기 때문이다. '사랑'이 첨가되었을 때 비로소 완성된 삼위일체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생선찌개를 끓일 때 모든 재료가 준비되었는데 주재료인 생선이 없다면 생선찌개를 만들 수 없는 것과 같이 '사랑'(성령)이 빠진 삼위일체론은 미완성일뿐이며 '사랑'이 없이는 편견에 의한 신학적 체계의 한 부분일 뿐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은 편견을 버리고 영적으로 바라보면 철저하게 하나님이 개입하셨음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3) 신학적 해석의 모순

 

지금과 같은 신학적 해석 방법으로는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은 신비가 아닌 모순으로 만들게 되는 결과만을 가져온다. '예수는 성령이다'라는 등식을 통하여 신학적 해석의 모순을 몇 가지 논증하고자 한다.

 

성서적으로 '예수는 성령이다'의 고찰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다 "주는 영이시다"라고 선포하고 있다.(고후3:17) 또 공동번역에서는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라고 번역이 되어 있다. 이미 성경을 이탈하면서 까지 무리하게 교리를 세우려고 해서는 안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성경이 최우선과 중심이 되어야만 한다는 원칙을 잊어서는 안된다.

 

삼위의 통일성에서 '예수는 성령이다'의 고찰

 

위격인 각각의 개체로써는 절대 따로따로 생각해서는 안되며 개체만을 가지고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 그러나 통일성(일체)안에서는 서로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주장하는 삼위일체의 원칙이다.("한위격으로도 모든 분을 의미할 수 있다"라고 1권에서는 언급하고 있다.)

 

물을 비유로 설명을 하자면 물로 형성이 되지 않은 각각의 개체로써는 '물은 물이며 산소는 산소이고 수소는 수소이다'라는 것만이 성립되지만 이것이 결합하여 물로 형성(통일)된 다음에는 각각 개체로써의 산소, 수소가 아니라 이미 산소는 물이고 수소도 물이다 라는 것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통일성 안에서는 삼위 중 하나가 전부를 대표할 수 있다. 곧 성부는 성자이며 성령이다. 성자는 성령이며 성부이다. 성령은 성부이며 성자이다 라는 등식이 성립이 되며 표현될 수 있다. 이러한 등식이 성립될 수 없다면 그것은 통일성(일체, 본질)이 아니다. 통일성 안에서는 삼위께서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기에 '예수는 성령이다'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성령이다'라는 것이 신학적으로는 성립이 될 수 없는 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즉 각각의 위격의 관계에서 위격 단독만을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아래의 그림과 같이 삼위의 통일된 위격 안에서의 위격을 해석하는지의 차이인 것이다.
 

trinity.jpg

 

신학에서는 각각의 위격만을 가지고 해석하고자 한다.

 

한 위격으로만 생각하면 절대 성부는 성부이며, 성자는 성자이고 성령은 성령인 것이다.(설명상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여기에서 신학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많은 오해가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주장은 각각의 위격과 동일성 안에서의 통일된 위격을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위격으로만 보면 '예수는 성령이다'가 절대 성립될 수 없지만 통일성안에서는 얼마든지 '예수는 성령이다'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 있다.

 

위에서도 물로 설명했듯이 각각의 개체인 수소와 산소가 물로 이미 형성된 뒤에는(통일성) 산소는 물이며, 수소도 물이며 물도 물이 되는 것처럼. 삼위의 통일성안에서는 성부=성자=성령, 성자=성부=성령, 성령=성부=성자가 되는 것이며 성부, 성자, 성령은 불사하시며 동일하신 일체이며 한 분의 위격으로 모든 분을 포함할 수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주장은 위격을 따로따로 해석하려는 것에 대하여 엄격히 성부, 성자, 성령을 한 통일된 일체로 볼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곧 '하나는 셋이며 또한 셋은 하나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셋이 하나가 된 통일된 위격은 이제 하나가 아니라 나머지 둘도 포함되어 있으며 하나만으로도 둘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이다.(위의 그림참조)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상징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사상의 핵심인 통일성(oneness), 동등(equality), 본질(Substantia), 일체인 것이다.

 

신학에서 해석하는 것과 같이 위격만을 가지고 해석한다면 그것은 어거스틴의 통일성 전체를 송두리째 뒤집어서 모순 투성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것은 곧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모순과 궤변으로 만들고 파괴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동일성에서의 '예수는 성령이다' 의 고찰

 

동일성이란 '같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동일성의 의미는 성부, 성자, 성령이 동일하다는 것으로 이것은 성부=성자=성령의 등식이 성립된다. 그러므로 '예수는 성령이다'가 성립되는 것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출생이 아니라 발출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공동적 발출(Procession) 했다고 주장한다.

 

성령의 발출은 시간 밖에서 이해해야 된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출생(발생 Generation)한다. 성령은 주로 성부로부터 발출(나오심 Procession) 되는데 성령은 성부가 시간의 간격없이 성부, 성자 두 분으로부터 공통적으로 출생이 아니라 발출시킨다.

 

여기에서 '예수는 성령이다' 라고 하면 잘못된 것으로 알고 오해를 하고 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공통적 발출이다. 그러기에 성령이 예수와 동등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출생된 것이 아니라 발출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쉽게 설명하자면 한국내의 미국대사관은 미국정부에서 한국으로 미국정부를 대신해서 행정 업무를 보기 위하여 파견 보낸(발출) 것이다. 미국 대사관은 한국의 영토 안에 있지만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곳이기 때문에 미국 정부와 같이 미국 영토로써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한국내의 미국 영토인 것이다. 미국이 없는 미국 대사관은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독자적인 성령 혼자만의 성령이 아니라 성령은 이미 삼위의 대표로써 예수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성령이다'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주의 영에 대한 '예수는 성령이다'의 고찰

 

어거스틴은 '영(성령)을 성부의 영은 성자의 영이며 성령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예수는 성령이다'라고 한다면 신학적 삼위일체에는 위배이다. 신학이 삼위일체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는 영이시며, 주의 영은 성령이다'라고 한다면 신학적 삼위일체에 전혀 훼손하지 않는 해석이라고 할 것이다. 또는 '예수는 영이시고(고후3:17) 예수의 영은 성령이다'라고 해도 삼위일체를 훼손하지도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는 성령이다'와 '예수님의 영은 성령이다'(또는 '주의 영은 성령이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해석상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도 없는 똑같은 말이다.

 

성부의 영은 성자의 영이며 성령이다 라는 성서적 표현 만큼 삼위일체를 완전하게 극복하고 함축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이미 이 안에 성부는 성령이시며 예수는 성령이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시며 예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하늘나라인 의와 희락과 평강으로 함께 한 작용으로 역사되고 있다. 성경을 무리하게 해석하면서까지 교리를 세우려고 해서는 안된다. 예수는 성령이 안된다고 주장한다면 첫째, 성경의 위배이며 두 번째, 어거스틴의 20여년간의 노작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파괴 행위인 것이다.

 

신학을 향한 충고

 

'예수는 성령이다'라고 하면 사벨리우스(Sabellius)의 양태론(Modalismus)을 운운하며 이단이라고 매도하는 성급하고 극단적인 편견은 버려야 한다. 만약 이러한 편견을 버리지 않는다면 결국 어거스틴도 양태론자라고 하는 것과 같으며 그 이유는 신학자들이 너무 잘 알고들 있을 것이다. 항상 그래왔던 것 처럼 삼위일체가 자신들의 주장만으로 또 다시 악용되거나 남용되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만 한다.

 

약 2,000여년 동안 논쟁을 통하여 삼위일체론의 허와 모순들을 신학은 보아 왔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는 이제 변증과 비판을 할 수 있는 신앙으로 신학은 성숙되어 왔다. 신학자들은 이렇게 축적된 지식을 가지고 침묵하지 말고 참 삼위일체를 제시해 주어야 하며 어거스틴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잘못 해석되어진 삼위일체를 이제는 바르게 돌려 놓아야 한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삼위일체의 해석에 있어서 위격만으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삼위의 통일성 속에서 위격을 해석할 것인가에 따라서 수 많은 신앙의 오해들이 발생된 것이다. 지금의 신학은 위격에서만의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은 통일성속에서의 위격으로 해석할 때만이 그가 주장하는 삼위일체(De Trinitate)의 의미를 조금도 훼손시키지 않고 모순들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이성으로써의 완성인 것이다. 신학은 삼위일체의 진정한 의미와 참을 보려면 편견을 버리고 묵상과 기도속에서 오직 성령의 도우심만으로 모든 것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크리스챤들이 지식을 찾는 가장 기본이 되는 자세이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의 삼위일체론의 목적중 하나는 이성(교리)은 상호모순으로써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려는 자들을 차단시키고자 하시는 화염검인 것이며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알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어거스틴의 주장을 훼손하고자 하는 뜻이 절대 아니며 바르게 세우자는 것이다. 이 거대한 삼위일체의 산맥이 그동안 유일신 사상으로 기독교를 지탱해 주었기에 지금까지 흔들림과 동요없이 굳건하게 유지되었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누군가는 어거스틴처럼 그 시대 상황에서는 그래야만 했고, 그래야만 했을 것이며, 또 그랬어야 하는 것이다.

 

"...이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서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행5:38-39)라고 가말리엘 교법사가 말한 것과 같이 1,600여년 동안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이 지탱해 주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증거인 것이다. 이제는 어거스틴이 주장한 참 삼위일체의 사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현대 교회는 해석상의 오류로 말미암아 '예수는 성령이다'를 부정함으로써 형식상으로는 삼위일체 신앙을 주장하고 있지만 실상 내용 면에서는 이위일체 신앙들을 고수하고 있다. 곧 성부와 성자만 있지 성령이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균형 있는 삼위일체 신앙으로 돌아갈 때만이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바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질문6] "그리스도는 성령이다"라는 것은 논제 자체가 모순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삼위일체론을 전혀 잘못 이해하고 계시는군요. 삼위일체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라는 의미이지, 그리스도가 성령이다라고 주장한다면 성부, 성자, 성령의 각각의 독립적으로 존재하시는 것을 부정하고,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이시고, 성령은 성령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따로 있고, 성령의 사역이 따로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은 엄연히 다릅니다. 성령은 성령이시고,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이시지 그리스도가 성령이고, 성령이 그리스도는 아닙니다.

 

[답변] 나름대로 전개하신 논리가 전혀 설득력이 없으며 일반적인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가 안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든지 삼위일체가 모든 교리의 기초가 된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며 삼위 일체는 문자 그대로 성부. 성자. 성령(삼위)은 결국은 하나(일체)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많은 문장을 나열하여 나름대로 모양은 그럴듯해 보이나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는 인정하면서 결국 일체는 모두 부인하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이고, 성령은 성령이며, '그리스도의 영'과 '성령의 영'이 각기 다르다는 이상한 논리는 '삼위일체'가 아니라 '삼위 삼체'라고 표현하셔야 옳은 것입니다.(삼위 일체에 대해서는 저의 메시지 '휴거는 없다'[1]편에 자세하게 언급하였으니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삼위일체에 대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질문하신 논리대로라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롬8:9) 는 말씀을 부인하시는 것이 아닌가요?


[질문7] '예수님이 성령'그 자체이다 라는 등식을 쓰기에는 좀 무리가 아닌가 하고 생각되어집니다.

 

[답변] 이견에 대한 증거로 요14:16절의 "...또 다른 보혜사"라는 말씀을 예로 드셨습니다. 그러나 그 보혜사는 곧 예수님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며 요14:26절에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는 말씀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예를 한가지 더 들어보면 막16:20절에 "...하늘로 올리 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라는 말씀에서도 보듯이 "주께서" 라는 말씀은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며 주께서 라는 뜻은 곧 성령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질문9] ① 예수님의 사역을 1차, 2차 사역으로 나누셨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이 불완전하다는 것인지요? ② 예수님과 성령님은 분명히 서로 다른 분이십니다.

 

[답변] ① 예수님의 공생애의 '육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은 모두 그리스도의 사역만 편의상 이해하기 쉽도록 세분화해서 설명한 것입니다.(휴거는 없다 1편참조)

 

이를 뒷받침하는 말씀으로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아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막16:19-20). ② 질문의 내용대로 예수님 따로 성령 따로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하였다는 구절의 '주'는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며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주를 어떻게 해석할 것입니까?


[질문12] 영으로 부활하셨다고 한다면 고전15장의 부활에 대한 모든 기록에서 육체의 부활을 설명하기 곤란하게 되어 기독교의 근본이 되고 중요한 부활을 매우 흔들어 버리는 결과가 될 것 같습니다.

 

[답변] 성령의 사역을 설명하다보니 마치 육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처럼 비춰지는 것 같습니다만 저 역시 부활에 대해서는 질문하신 의견과 같이 영, 혼, 몸이 다 부활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나신 탄생의 신비와 마찬가지로 부활은

1.예언을 응하는 것이며

2.성령의 살아 계심을 상징으로 나타낸 것이고

3.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를 다시 언급해 보면 영은 살과 뼈가 없어 감각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나 무리에게 육체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은 성령이 살아 계심을 그대로 보여 주신 것이며 이는 곧 준비된 자에게는 성도의 육체로도 감각할 수 있게 나타내 보여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 좋은 예로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에게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과 성령을 직접 체험을 해본 모든 크리스챤들은 이를 모두 공감할 것입니다.

 


PS : 참고로 이 분의 글과 동일한 주장을 하고 계시는 미국 플러신학교 루이스 B. 스미디즈 교수의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루이스 스미디즈, 오광만 역, 여수룬, 1991)에 대한 소개가 위에 "한국 기독교계의 취약 분야! 꼭 읽어 보시기를..."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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